이념보다 빵이 급한 소련/김진국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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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소련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한 반대시위가 공산당 사상 최대규모로 벌어지고 있다.
문득 연초 대학생들의 동구권 연수단에 끼여 갔다온 모스크바의 장면 장면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대학생 연수단을 안내한 소련 국영 관광회사 인투리스트의 일리나(여)는 이번 시위사태를 암시하는 설명을 여러차례 했었다. 그녀는 『많은 한국사람이 고르바초프를 좋아한다』는 말에 『노』라고 대답했다. 『페레스트로이카를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도 『노』였다. 반대로 옐친에 대해 묻자 『더 낫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때 선망의 눈으로 보던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심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소련사회의 분위기는 우리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또 자신들의 「자랑거리」중심으로 안내하는 공산권의 실상에 학생들은 한결같이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하고 입을 모았다.
일리나는 크렘린 왕궁을 안내하다 레닌동상 앞에서 『일부 한국 학생들이 레닌을 존경하고 있다』는 기자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당신도 존경하느냐』고 묻고는 『소련인민에게는 불행한 역사였다』고 고개를 저었다.
『레닌은 전략·전술이 뛰어나고 우수한 사람이었지만 경제개발에 관한 아무런 계획도 없이 스탈린에게 권력을 넘겨주었습니다. 그 스탈린은 30년이 넘는 오랜 기간동안 피의 숙청을 하는 등 전체주의 체제를 굳혀 소련을 후퇴시켰습니다.』
그래도 차르체제보다는 공산주의가 더 낫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려다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폴란드의 한 한국어과 교수는 한국 학생들에게 『좌파이념이란 어느 시대,어느 곳에서나 있는 것이고 필요하지만 현실 정치체제로서의 공산주의는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곳곳에서 혁명에 대한 회의와 이념의 혼란이 역력해 보였다.
소비재의 절대적 부족으로 달러에 대한 공식환율 0.6루블의 암거래시세는 25루블에 이르고,고급호텔의 종업원조차 서비스도중 『돌러리,돌러리』하며 「환전부업」에 더 골몰했다.
우리나라가 대소 수교를 위해 30억달러의 거금을 선뜻 내놓는 것이 소련의 능력을 과대평가한데서 나온 정책이 아닌가 해서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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