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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性 살인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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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74년 1월 31일, 미국 워싱턴주(州)의 워싱턴대학에 다니는 린다 힐리가 하숙방에서 연기처럼 사라진다. 한달 뒤 같은 주 다른 대학에서도 여학생이 실종된다. 이후 비슷한 지역에서 20명이 넘는 여성들이 사라졌다가 성폭행당한 채 시신으로 발견된다. 나중에 목격자 제보로 붙잡힌 살인마는 평범해 보이는 젊은이 테드 밴디였다. 그는 날마다 포르노 잡지를 탐독하면서 변태성욕에 빠져들다가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성(性)충동은 때로는 희대의 살인마를 만들어낸다. 성 상대를 파괴하는 행동을 되풀이해 쾌감을 느끼는 자들이다. 6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13명을 살해한 앨버트 데살보도 '쾌락 살인마'였다. 그는 범행 때마다 녹색 바지를 입어 '그린의 사나이'라는 악명까지 얻었다.

성 살인마의 심리는 난수표와 같다. 얽히고 꼬여 있어 범행 동기를 좀처럼 찾아내기 어렵다. 다만 불우한 가정환경, 그것도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부정적 인격에 영향을 받은 자들이 많다. 술을 좋아하고 난폭하며 방탕한 성생활을 하는 등….

물론 83년 체포된 영국의 데니스 닐센처럼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상(異常)심리 살인마'도 있다. 공무원이자 동성연애자였던 그는 호모 15명을 죽여 자신의 아파트에 충격적인 방법으로 시신을 보관해오다 붙잡혔다. 그의 행각은 '양들의 침묵' 같은 잔혹 영화에 소재가 되기도 했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89년부터 2년간 다섯명의 남자를 유인해 살해한 매춘부 에이린 워노는 '성 혐오 살인마'유형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에게 자주 맞고 남성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남성에 대한 증오를 키워왔다고 한다.

요즘 '그린리버(첫 범행장소 지명)의 살인마'가 범행을 자백해 미국이 떠들썩하다. 80년대 초부터 48명의 매춘부 등을 맹목적인 혐오증 때문에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 살인마는 84년 용의자로 지목되고도 증거가 없어 풀려났었다. 최근 DNA 기술이 발전하면서 희생자 몸에서 채취한 그의 유전자를 분석해내 단죄할 수 있었다고 한다.

86년 9월 첫 사건 발생 이후 10여명의 희생자가 난 화성 살인사건은 아직 미궁에 빠져 있다. 한국 경찰은 이런 개가를 거둘 수 없는 걸까. 바로 우리 곁에서 화성의 살인마가 조용히 웃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규연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