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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클로즈 업] 척보면 좌르르 … '번갯불 觀相' 쩡칭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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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을 공부하면 누구나 쉽게 자기 운명을 알 수 있는가? 그건 아니다. 책 몇 권 읽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도사'가 되는 길은 멀고 험하다. 당연히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단계는 '칼잡이'다. 면도칼.회칼.장도칼.부엌칼.쌍둥이칼 등 여러 종류의 칼을 수집하는 단계가 칼잡이의 경지다. 사람의 사주를 놓고 분석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회칼을 가지고 분석하다가, 잘 안 되는 부분을 만나면 면도칼을 들이대기도 한다. 면도칼이 들어가지 않는 대목은 다시 장도칼로 내리쳐 보기도 한다. 이 칼, 저 칼을 들이대면서 '칼의 노래'를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칼이라는 것은 문파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이론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자평파(子平派).적천수파(滴天髓派).궁통보감파(窮通寶鑑派).삼명통회파(三命通會派) 등등이다. 이들 문파는 각기 비전의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전체 격국(格局)을 잘 파악하는가 하면, 대운이 언제 들어오는가를 감지하는 데 장기가 있거나, 사람의 질병을 신통하게 알아내는 문파도 있다. 무협지에서 소림파.화산파.무당파.아미파.개방파가 할거하고 있듯이, 명리학의 문파들도 각자의 주특기를 강호에 홍보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제화 바람을 타고 해외로 눈을 돌려 중국이나 일본의 문파에 입문하기도 한다.

칼잡이는 각 문파를 순회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문파에서 공부하다가 저쪽 문파에 고수가 있다고 하면 얼른 당적을 옮긴다. 그러다가 다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면 그쪽으로 우르르 달려간다. 이 과정에서 각종 칼들을 수집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칼을 사용하더라도 사람의 사주를 아주 속시원하게 해부하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각 문파의 이론은 빠삭하게 알고 있지만 실전에 부닥치면 힘을 쓰지 못한다. 너무 다양한 이론을 섭취하다가 혼란에 빠진 셈이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해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이 기간이 대략 잡아서 10년이다. 대부분의 사주 입문자는 이 단계에서 길을 잃고 포기해 버린다. 1백명이 입문하면 이 단계에서 95명은 탈락한다. 그렇다면 칼잡이 수준에서 얻는 소득은 아무것도 없는가. 있기는 있다. 자기 팔자의 대략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재복이 있는가 없는가, 관운이 있는가 없는가, 배우자 복이 있는가 없는가, 운이 30대부터 오는가 아니면 50대부터 오는가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구체적으로 몇 살 때 무슨 일을 한다든지, 지금 누구를 만나면 좋다든지, 이 사업을 그만두고 저 사업을 시작할 것인지 등등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10년 정도 공부한 칼잡이의 수준을 바둑으로 따진다면 1급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기원에 가서 내기 바둑은 둘 수 있지만, 프로에 입문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입단을 해야 프로가 되고, 프로가 되어야만 책임지고 사람을 지도해줄 수 있다.

입단의 단계는 무엇인가. 칼잡이 다음에는 '해머(망치)'다. 칼을 버리고 20㎏이 나가는 묵직한 해머 하나만 달랑 들고 다닌다. 사주를 볼 때 칼로 이곳저곳 요리하지 않는다. 해머로 한방에 부숴버린다. 누구든지 걸리면 박살난다. 매우 우직한 동작이지만 효과는 분명하다. 해머를 휴대하기 위해서는 각 문파의 이론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격국과 용신(用神)에 얽매이면 안 된다. 바둑의 '국수는 옛 기보를 버리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國手 不廢舊譜 不執舊譜)'는 말이 이것이다.

문자를 버리고 선(禪)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산수도의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 전국의 명산을 순회할 필요가 있다. 어느 산의 어느 암자가 '기도발'이 잘 받는가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적중률에서 칼잡이가 60% 정도라면, 해머는 80%에 육박한다. 해머 하나 들고 있으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다. 어디를 가더라도 밥을 굶지는 않는다. 강호를 유람하면서 어떤 강적을 만나더라도 크게 밀리지는 않는다. 필자가 짐작하기로 국내의 해머급 인사는 20명 내외다.

해머 다음에는 '번갯불'이다. 사주팔자 여덟 글자를 볼 필요도 없다. 상대 얼굴을 척 보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그 사람의 심중과 상황을 읽어내는 차원이 번갯불이다. 그야말로 절정고수다. 이런 인물은 흔하지 않아 만나기 어렵다. 인연복이 있어야 이런 인물을 만나 인생감정을 받을 수 있다. 번갯불급의 인물이 되어야만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수 있다고 본다. 고려시대에 존재하였던 국사(國師)나 왕사(王師)는 아마 이런 수준의 고승이었을 것이다. 외국의 사신이 왔을 때 그 사신의 성격이나 행동양태를 예측하고 있거나, 파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와 같은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을 줄 수 있다.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많은 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젊은 청년들을 명분없는 전쟁터로 내모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朴대통령은 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국내의 여러 고수들에게 자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한명이 바로 천태종의 창시자인 상월조사(上月祖師:1911~1974))였다. 상월조사의 입장은 '어렵더라도 파병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국가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예언이었다. 朴대통령은 상월조사의 시원한 말을 듣고 근심을 털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번갯불급(혹은 해머급?) 인물은 공산당 서열 5위인 쩡칭훙(曾慶紅)이라고 한다. 그만큼 주역을 비롯한 역술에 달통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장쩌민(江澤民)이 내리는 주요한 결정에는 그의 조언이 작용한다는 얘기도 있다. 특히 지인지감(知人之鑑.사람을 잘 알아보는 능력)이 탁월해 사람을 발탁하고 버리는 문제나 결정을 내리는 타이밍, 진퇴 등에 대한 판단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장쩌민이 권력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고비고비마다 쩡칭훙의 조언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만나본 국내의 번갯불은 제산(霽山) 박재현(朴宰顯:1935~2000)이다. 속칭 '박도사'로 불리면서 1970~80년대에 걸쳐 한국의 정계나 재계의 고위층들 사이에 회자되던 인물이다. 다음에는 이 박도사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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