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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먼 특약특파원 바그다드 탈출기(걸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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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간첩혐의로 2주간 투옥/발가벗기운채 수갑차고 조사 받기도/공군사옆 걷다 군인들에 잡혀/송고차 미 대사관 가다 “횡액”/신원확인 없이 자백만 강요/빼앗긴 지갑 텔렉스카드·5백불없이 돌아와
바그다드에서 취재하면서 중앙일보와의 특약에 따라 특별송고하다가 미군공습과 함께 행방불명됐던 영국 데일리 텔리그라프지 서울주재 특파원 브루스 체스먼씨가 지난달 30일 이라크에서 요르단의 수도 암만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통신시설이 두절된 17일새벽 주바그다드 미국대사관에 가면 송고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공습을 무릅쓰고 시내를 달리다가 이라크군에 의해 체포됐다. 서둘러 호텔에서 나오느라 자신의 신분을 밝혀줄 여권을 휴대하지 못했다. 비인도적 처우와 거듭된 이송,냉혹한 신문등 닷새간의 조사과정을 거쳐 그는 간첩혐의로 투옥됐다. 체포 2주일만에 이라크당국으로부터 풀려난 즉시 31일 암만에서 중앙일보에 긴급 송고한 체스먼씨의 바그다드 고난수기를 옮긴다.<편집자주>
양 손은 수갑에 채이고 눈이 가려진채 내가 앉아있었던 방은 지난해 대이라크 스파이혐의로 체포돼 처형됐던 다른 영국인기자가 신문받던 바로 그 방이었다.
조사관은 나에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잡혀와 조사를 받은지 닷새만에 처음 느끼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나는 바그다드시에 첫 공습이 있었던 지난달 17일새벽 기사송고를 위해 폭격으로 어지럽혀진 시가지를 달리며 전화기를 찾아 뛰어다닐 때도 이같은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더 말할 것이 없는가.』
조사관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조사관은 『다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곤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이라크 감옥에 4일간 구금됐다가 다시 폭격이 극심한 가운데 호텔로 옮겨져 갇혀있었으며 요르단 국경을 넘어 풀려난 것은 처음 체포된 날로부터 2주일이 지나서였다.
조사관의 차가운 목소리는 스파이행위혐의로 붙잡혀 조사를 받던 가장 으스스했던 나의 기억에 여전히 남아있다.
나의 악몽은 17일 오전 2시30분부터 시작됐다. 나는 호텔방에서 잠들어 있던중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대공포와 대공로킷포 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급히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옷을 더듬어 찾았다. 그리고 신속하게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호텔방 열쇠를 방안에 남겨두고 나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방공호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여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녀들을 안전하게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기사송고를 위한 전화회선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어디로 가면 전화를 걸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바그다드 주재 미국대사관에 가면 가능할 것 같았다.
곧바로 호텔밖으로 나가려했다. 나와 같이 있던 서방측 기자 몇명도 같이 따라 나섰다. 그러나 호텔 프런트에서 경비서던 이라크군 병사들로부터 제지를 받았다. 밖에 나가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때 호텔정원으로 연결된 옆문이 생각났다. 다행히 그쪽엔 경비병이 없었다. 나는 호텔 뒤편으로 돌아와 옆문을 이용,밖으로 빠져나왔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다.
밤하늘은 온통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로킷이 날고 대공포화가 작렬하고 있었다.
정원에서 얼마를 달려가니 벽이 나타났다. 벽 한쪽의 경비초소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계단을 타고 경비초소로 올라가 담장밖으로 몸을 굽혀 무사히 담을 넘었다. 7m정도 높이의 높은 담이었으나 상처를 받진 않았다.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자동차를 잡으려 했다. 여기서 대사관까지는 자동차로 보통 25분정도 걸린다.
그러나 그날밤 상황에서 어떤 자동차가 나를 위해 멈춰주겠는가. 자동차 몇대가 눈에 띄긴 했으나 모두 맹렬한 속도로 지나갈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도보로 갈 작정을 했다. 밤공기는 상당히 쌀쌀했으며 거리에 인적이라곤 거의 없었다. 주인을 잃은 개 몇마리가 거리를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간혹 담배 불빛으로 생각되는 붉은 빛을 볼 수 있었는데 공습을 피해 건물 속으로 몸을 피한 바그다드 시민들이었다.
나는 티그리스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뛰어서 건넌후 대사관이 위치해 있는 지역으로 향했다. 전에 승용차로 밖에 가본적이 없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내내 걱정이 됐다.
대사관이 있는 니달가를 발견하고 집에 다왔다는 느낌이 들면서 목이 말랐다. 그러나 1,2㎞를 더 걸으면서 시가저편에서 들려오는 고사포의 일제 사격소리와 폭탄의 섬광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골목으로 접어드는 순간 군인이 뒤에서 나를 낚아챘다. 그 군인이 나의 어깨를 누르면서 나를 돌려세우는 순간 다른 군인들이 달려왔고 나를 미국조종사라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시브하비』(아랍어로 기자라는 의미)라고 외쳤다. 『아니야,너는 조종사다』라고 말한 그 군인은 나를 한 기지로 끌고 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곳은 공군최고 사령부본부였다. 하필이면 내가 끌려간 곳이 이 도시에서 최고의 전략공격 목표지점이라니.
군인들은 사지를 들어 나를 기지로 데려간후 몸수색을 하고 창고로 쓰이는 조그만 방에 처넣고 문을 잠갔다.
전도시에 폭격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공보부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만 해주면 곧 풀려날 것으로 나는 믿었다.
콘크리트바닥에 누워 나는 개전초기부터 이상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신분증은 군인들이 2천7백달러가 든 지갑과 함께 뺏어간 데일리 텔리그라프 텔렉스 카드였다.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불빛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나는 밖으로 끌려나갔다.
나는 즉각 눈이 가려지고 수갑이 채워진채 승용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이송됐다.
서다 가다를 계속하다 난사하는 대공포화의 화염이 보이고 폭탄터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곳에 도달했다. 차가 끽소리를 내며 멈추자마자 문이 열렸고 나는 방공호로 보이는 곳의 계단 앞으로 발길에 채어 굴러 떨어졌다.
방공호 속에서는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공습해제 사이렌이 울리자 나는 다시 차 뒷좌석에 처박혀 어디론지 끌려갔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검문때문에 시간이 어느 정도나 흘렀는지 알 수 없게 될 때쯤 드디어 한 방에 도달,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고개를 들려하자 『라작』이라고 외치며 목덜미를 후려쳤다. 후에 알았지만 「라작」이란 말은 머리를 숙이고 있으란 뜻이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내옆을 천천히 지나 자리에 앉았다.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당신 누구요. 공군사령부 건물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소』라고 말하는 유창한 영어가 들려왔다.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들려할때마다 목덜미를 얻어 맞았다.
나는 자초지종 다 말하고 호텔과 공보부에 전화를 걸어 보라고 간청했다.
그는 내 요청을 무시하고 신문을 계속했다.
결국 그는 『영국 스파이 바조프트를 아시오』라고 물었다.
그는 이라크 핵산업에 너무 가까이 접근,취재하다가 처형된 이란 출신 업저버지 특파원 파르자드 바조프트를 말하고 있었다.
내가 바그다드로 가겠다고 하자 데스크가 총에 맞아 기사를 쓸수 없게될 지도 모르는 바그다드에 가려는 이유가 뭐냐고 농담하던 일이 생각났다.
바조프트를 안다고 대답하자 그가 나도 영국 스파이라며 살고싶으면 진실을 말하라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진실을 말하시오. 안그러면 나로선 당신을 살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소』라고 말했다.
내가 앞서한 말을 반복하자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동안 내 양옆에 있던 두명의 경비병중 한명이 『이 방은 바로 바조프트가 처음 조사를 받던 곳』이라고 말했다.
(체스먼씨는 이어지는 수기를 통해 그가 다섯번이나 더 이송을 계속했고 그때마다 다시 조사를 받았다고 적었다. 그는 전나가 되어 신문을 받기도 하고 이틀에 한번 화장실에 가도록 하는 비인도적 대우를 받는가하면 「짐승도 못먹을 귀리죽」을 먹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감시병은 군대에서 음식을 충분히 지급받지 못해 가족들이 공급해준 음식을 몰래 그에게 나눠줘 배를 채울수도 있었다고 술회했다.
죄수복을 입고 수감됐던 4일을 포함,체포후 1주일간의 고초끝에 그는 바그다드의 라시드호텔로 되돌려 보내졌다. 이과정을 생략한 체스먼씨 수기의 말미는 다음과 같다­편집자주)
아직도 궁금한 것은 개전때까지 나와 함께 호텔방을 썼던 USA투데이지의 돈 커크기자가 내 여권을 가지고 암만으로 떠나버린 점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텔렉스 카드가 내 신분을 확인하는데 충분하기 때문에 여권이 꼭 있어야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카드도 사라졌고 돈도 5백달러가 없어진채 돌아왔다.
라시드 호텔에 돌아왔지만 나는 석방되어 바그다드를 떠날 수 있게 할 종이 한장을 위해 7일을 다시 기다렸다. 나는 석방된후 텔리비전을 통해 두명의 미군조종사들이 인터뷰에 끌려나온 것을 보았다. 이라크에 포로로 잡히는 다국적군 조종사들,그리고 개전후 쿠웨이트접경지역에서 취재중 행방불명이 된 CBS­TV 사람들의 안전과 대우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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