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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칼럼

대학생의 꼬인 문장, 대통령의 꼬인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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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후생가외(後生可畏)라 했던가. 짧은 시간, 원고지 몇 장 분량의 공간에 깊이 있는 사고와 유려한 문장을 맛깔스럽게 버무려 낸 수험생이 적지 않았다. 모든 답안이 다 그랬던 건 아니다. '안습(안구에 습기가 차다=눈물이 나다)'이나 '현피(현실 Player Killing의 약자로 온라인상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실제로 싸우는 일)' 같은 게임.인터넷용어를 아무 설명 없이 비중 있게 사용한 수험생도 있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몇몇 답안에서 보이는 '꼬인' 문장들이다.

'하지만 현재는 인터넷을 통한 대출 신청이나 은행 홈페이지를 통해 금융상품에 가입할 수 있다'.

'슬픈 사실은 수중도시가 건설된다 하더라도 공상소설 속 바다처럼 바다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공연히 명사구를 써서 문장이 엉켰거나 주술 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문장이다. 더 심한 것도 눈에 띄었다. '고려장의 풍습이 고려시대 때에는 유무의 판단이 확실친 않아도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언제 토사구팽당할지 모르는 처지에 놓인 것은 확실하다'. 애써 유추하니 대강의 뜻은 짐작되는데, 그렇더라도 초.중.고교와 대학을 제대로 마친 이의 문장으로 봐주기는 힘들다.

좀 더 세련되게(?) 오류를 범한 문장을 보자.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가 지난해 6월 개최한 국제심포지엄에서 김태환(덕성여대 교양과정) 교수가 '한국대학 글쓰기 교육의 과제' 논문을 발표하면서 예로 든 문장이다.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폴라니가 연구한 중심 과제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그 비판의 내용은 시장의 불완전성 혹은 불안정성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성이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문장 앞부분의 '폴라니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연구했고, 그의 연구는 비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원래 의미가 용어를 부정확하게 나열한 탓에 마치 '폴라니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을 연구했다'는 뜻인 양 변질됐다. 김 교수는 "한국인들은 한국어 문장의 오류를 잘 알아차리지 못할 뿐 아니라 알아차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며 "특히 학생들의 글쓰기 문제는 인터넷.입시 등 외적 요인 탓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학생들이 접하는 잘못된 글에서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학생들이 접하는 것은 잘못된 글뿐이 아니다. 잘못된 말, 엉키고 꼬인 말도 학생들에게 독이 된다. 선생님의 말, 부모님의 말, 아나운서의 말, 정치가의 말이 자라는 세대에게는 전부 교과서나 마찬가지다. 그 어떤 정치인보다 말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진 노무현 대통령의 어록이 학생들에게 모범적이지 못한 것은 그래서 커다란 아이러니다.

나는 노 대통령이 일찌감치 '깽판'이나 '통빡' 같은 저속한 용어를 썼을 때 놀라고 상처받은 사람 중 하나다. 최근의 북한 핵실험과 청와대.여당 대립의 와중에서는 그의 '꼬인' 말에 또 상처받았다. "포용정책은 궁극적으로 포기할 일은 아니지만, 상황이 바뀌고 있는 객관적 상황" "가급적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지만 그 길밖에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듣는 이마저 혀가 뒤틀리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표현들 아닌가. 말하는 의도나 진정성을 제쳐놓고 따진다면, 노 대통령보다는 차라리 "본인은…"으로 시작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점잔 피우는 화법이 훨씬 간명하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다. 1년여 남은 임기 중 이것 하나만 신경 쓰시라고 여기저기서 주문이 밀리는 판에 필자까지 췌언(贅言)을 보태 죄송하지만, 대통령께선 앞으로 말 하나만 조심해 달라. 입을 떠난 말이 곧바로 국정교과서에 실려도 어법이나 품위.격조, 무엇 하나 흠잡히지 않을 그런 말만 해 달라고 간곡히 당부드린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