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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용사건 이후 권부 떠난 「4인방」(청와대비서실: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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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김대중 납치」로 도피·은둔의 세월 이후락/문세광사건에 “숙원” 못풀고 퇴진 박종규/서슬 퍼렇던 강창성도 좌천 후 12·12 나자 수감
윤필용사건은 제3공화국 최대의 정치음모극이자 박정희 집권 18년만에 큰 획을 긋는 정치사건이었다.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박대통령의 심복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하루아침에 감옥에 가자 그 여파는 여기저기서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권력의 맛을 만끽했으나 재직중 저지른 비리와 원한 때문에 가뜩이나 가슴죄던 김형욱 전 정보부장은 한달후 망명길을 떠나 박대통령에게 배반의 칼날을 겨누고 만다. 또 윤장군과 함께 거세될뻔 했던 이후락 정보부장은 박대통령 마음속의 노여움을 풀고 실지를 회복하려 안간힘을 쓰다 5개월 후인 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저지르게 된다.
이 사건의 여파로 제갈조조 이후락은 73년 12월 중앙정보부장을 물러나 도피겸 은둔의 생활을 하게된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내 반한 무드가 고조되고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게된 틈을 타 이듬해(74년) 8월15일 문세광사건이 터져 육영수여사가 피격된다. 이로 인해 그토록 경호실장을 벗어나 정보부장이 되고 싶어하던 박종규마저 두개를 다 놓치고 권부를 떠나고 말았다. 물론 강창성마저 예편되어 정부내 한 모퉁이를 지키는 평범한 관료가 되었다.
불과 1년여 사이에 박정희를 둘러싸고 있던 이후락·박종규·윤필용·강창성 등 핵심측근 네명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김재규 중정부장·차지철 경호실장이 들어선다.
「청와대내의 야당」으로 일컬어지던 육여사를 잃어버린 박대통령은 예전의 총기와 통찰력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김재규와 차지철간의 또다른 권력암투를 통제하는데 실패,끝내 10·26으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이같은 권력다툼과 또 부침속에 차세대를 준비하던 정규 육사11기는 윤필용장군 사건으로 잠시 된서리를 맞기는 했지만 「하나회」라는 신군부의 엘리트조직을 통해 살아남아 12·12와 5·17을 일으킨다.
이같은 반전과 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한 직접적인 계기는 윤필용사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필용사건을 이 나라 정치권력사의 분수령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정치사의 분수령
관련자들의 흥망성쇠 말고도 이 사건이 박정희통치 말기에 준 충격은 실로 컸다. 김형욱은 그의 회고록에서 윤필용이 당하는 것을 보고 나도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쓰고 있다. 또 청와대·정보부·군대 등 권력의 중추기관에서는 박대통령의 비위를 거스르면 누구나 당한다는 불안감과 함께 호신풍조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윤필용사건은 근본적으로 무리하게 만든 사건이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속된 10명중 절반이 무죄로 풀려난 것만 봐도 그렇다.
사건당시 문제의 「밀고자」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에게 권총을 들이댔다는 혐의(후에 이는 신씨의 허위신고로 판명)로 구속됐던 육본 범죄수사단장 지성한 대령(갑종 10기·현 사업)의 증언.
『실형선고를 받았던 사람들중 대부분은 곧 풀려났습니다. 윤장군 혼자 형무소에서 고생을 했죠.
그는 맹장수술을 받는등 무척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지요. 윤장군을 아끼는 선배나 따르던 후배들이 가슴이 아파 그의 석방을 박대통령에게 탄원하고 싶었지만 박대통령의 노여움이 서릿발같아 감히 어느 누구도 나설 엄두를 못내었죠.
그런데 육사5기 선배이자 윤장군에게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 자리를 물려주었던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현 민자당 최고위원)이 나섰어요. 청와대를 들어가기도 하고 포철을 방문한 박대통령을 만나는 틈을 이용,세차례에 걸쳐 석방을 호소했습니다.
「윤장군이 그렇게 각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는데 이것은 윤장군 하나만이 아니라 우리모두의 잘못입니다. 윤장군이 맹장수술도 받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각하,저희들 전체를 용서해주시는 셈치고 윤장군을 풀어주십시오. 윤장군 구속을 계기로 하나회와 비하나회세력이 대립해 군분열도 문제가 큽니다」라고 진언했지요. 그랬더니 박대통령이 이러더랍니다.
「내가 윤필용이를 그렇게 아끼고 총애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더욱 처신을 잘해야지. 그런데 듣기로 윤필용이가 나에 대해 말을 함부로 한다길래 박종규와 강창성이 더러 혼좀 내주라고 했는데 이 친구들이 일을 엄청나게 키워놓고 말았잖아. 나도 가슴이 아파. 곧 있을 유신헌법 찬반국민투표만 끝나면 내가 풀어주지」라고 했지요. 약속대로 윤장군은 투표후 곧 석방됐어요.』
박대통령이 스스로 모질게 한 것을 후회하고 다시 마음을 돌렸다는 얘기다. 그러나 윤필용씨는 『그분에게 누가 될까 두렵다』면서도 박대통령이 후회하고 용서했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글쎄요…. 박대통령 그분 실수없는 분입니다. 치밀하고 신중한 분이에요. 15년이나 옆에서 모신 내가 그분을 모르겠습니까.
내가 모반모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분이 잘 알고 계셨을 겁니다. 박종규·강창성이에게 속아서 나를 그렇게 했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측근 권력자중 JP(김종필)는 끝없이 탄압해 다스렸고 HR(이후락)는 그저 잔재주 피우는 걸 받아주면서 다스렸죠. HR가 김일성이 만나고 나서 우쭐대는 것 같고 하니 모델케이스로 나를 쳐버린거죠. 「이것봐라. 내가 그렇게 아끼던 윤필용이도 눈밖에 나면 이렇게 쳐버리지 않느냐. 너희들도 똑바로 해라」라는 추상같은 경고인 셈이었죠.
자 보세요. 그러고 나니 김형욱이가 안되겠다싶어 도망갔고 이후락이도 사실 도망갈 생각이 있었죠. 이유없이 장기외유를 하면서 혹시 박대통령이 자기 뒤를 캐지 않는가 하고 바짝 긴장했었죠. HR도 보통 겁을 먹었던게 아니었어요.
내 사건후에 친JP니 하는 따위의 말이 다 정계에서 쑥 들어갔잖습니까.』
윤씨는 그러면서도 박대통령이 자기를 미워했을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박대통령이 나를 미워하게된 데는 몇가지 사연이 있어요. 물론 대부분이 오해였죠. 군에서 나만 유독 3선개헌을 반대했다는 것도 그렇고 김형욱이 대통령의 충견노릇을 할때 내가 김을 견제한 것도 그렇고….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어요. 유신직후에 이후락 부장이 계엄하느라 수고한다며 나를 불러 박종규 실장 등과 함께 술을 샀어요.
내가 그랬지요. 「이제 어차피 계엄정치를 하게 되었으니 군인이 정치에 책임져야 한다. 그러려면 유정회의원의 3분의 1을 장군·영관·위관급을 똑같이 배분해 예편시켜 맡겨야 한다. 태국처럼 군인들이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 대통령한테 건의해 달라」고요. HR는 「각하한테 보고해 적어도 30석 정도는 만들어보겠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들으니 박대통령이 「건방진 놈들,지들이 뭔데 국회의원을 마음대로 고르려고 해」라고 화를 냈다는 거예요. 내가 내 세력을 국회에 박아놓으려고 한다고 오해한 거죠.』
○윤,군인정치 주장
윤씨는 『이젠 모든 것을 잊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결국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대중납치,김형욱의 배반,육여사피살,차지철의 방자한 독주,10·26,그리고 12·12,5·17,5공,6공,모든게 내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갈때 그분(박대통령)의 운도 내리막길을 향했던 거죠.
육여사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방안에서 밤새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리고 석방된 후에는 박대통령에게 붓글씨로 편지를 써 올렸죠. 「제가 불충하고 불민해서 각하 심기를 괴롭히고 세상을 소란케한 죄가 너무 큽니다」라고요. 답장을 주시지 않더군요. 10·26이 나서 그분이 세상을 떴을때 나는 전생과 후생의 눈물을 다 흘려버렸습니다. 야속하고 원망스럽고 불쌍해서요.』
윤장군사건으로 구속됐던 10인의 부인들은 그때부터 「낙동강 오리알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달 만나고 있다. 윤씨처럼 애증에 젖어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다른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박대통령의 군수기지사령관·최고회의 의장시절 전속부관을 하면서 총애를 받았던 손영길 전 수경사참모장(친동주산업 회장)은 『18년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다』며 이렇게 증언했다.
『저도 부덕한 사람이라 반성할 점이 있지요. 그러나 박종규와 강창성이의 권력놀음에 놀아나 그렇게 자신에게 충성을 바쳤던 부하를 무고하게 감옥살이 시킬 수가 있습니까. 전 박대통령을 원망했어요.
윤장군이야 직위가 높고 오해를 살만한 언행을 했다칩시다. 그러나 저나 다른 사람들이야 도대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 큰 형님 같았던 박대통령도 원망스러웠지만 평생 고락을 같이하자고 의형제 비슷한걸 맺었던 육사11기 하나회 멤버들에게 무척 섭섭했어요. 감옥에서 나온 후 전두환·노태우씨를 찾아갔습니다. 내가 물었죠.
「내가 하나회나 육사의 명예를 더럽힌 일을 했느냐. 내가 박종규나 강창성이의 주장대로 쿠데타 모의를 한 적이 있느냐. 있으면 너희들이 직접 내 가슴에 칼을 꽂아라」고요. 묵묵부답,아무 이야기도 않더군요. 그래서 내가 「국가도 하나 우정도 하나라고 했던 하나회 의리는 어디갔느냐. 내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직접 박대통령한테 찾아가 영길이는 죄가 없습니다고 했어야 옳지 않느냐. 나는 지금부터 너희들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하고 돌아섰어요.
그분들이 대통령이 된 후 청와대에 초청받아 두세번 저녁을 먹은 적도 있고 사업관계로 전대통령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지만 내 마음은 우리가 젊었을 때만 같지 않은데 대한 앙금이 있습니다.』
윤장군사건 당시 전두환 준장은 1공수여단장,노태우 대령은 보병부대 연대장을 맡고 있었으며 윤장군계열의 하나회 핵심멤버로 꼽혀 보안사 정보처가 작성한 1차 수사대상자 20명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대방동 큰 형님”
두 사람은 시내 용산호텔에서 윤장군과의 관계,하나회조직 등에 관해 집중 조사를 받았다.
실제 전·노 두 사람은 초급 장교시절 손영길·김복동·권익현·최성택·백운택(작고)씨 등과 함께 칠성회란 친목회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모태가 되어 61년말 하나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청년장교시절부터 손씨와 함께 윤장군을 「대방동 큰 형님」으로 모시며 따랐다.
그중에서도 전·노씨는 하나회를 배후지원한 박종규 경호실장의 도움으로 막판에 구제되었다.
육사11기들,그중에도 하나회 멤버들은 모두 윤필용사건으로 생존과 죽음의 갈림길에 섰었다. 당시 정황에 대한 강창성씨의 증언.
『1차 수사를 끝내고 박대통령의 최종결심을 받기 위해 차트에 하나회 조직표를 그려 대통령에게 가지고 갔지요. 당시 하나회 회원이 70∼80명 정도 되었을 겁니다. 박종규 실장과 김정염 비서실장도 배석한 자리였어요. 박대통령은 노기를 띠고 한사람 한사람 이름위에 직접 ○×를 하면서 「전두환이건 노태우건 윤필용이와 어울려 못된 짓 했으면 다 잡아넣어」라고 호통쳤어요. 나는 「전준장·노대령이 각하에게 불충한 말을 하거나 나쁜 짓을 모의한 적은 없습니다. 여기에 박실장이 있지만 손영길 준장과 권익현 대령은 윤장군과 가까웠고 전준장·노대령은 오히려 박실장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고 했지요. 사실 수사과정에서 박실장은 나한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전·노 두 사람은 관계없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어요.』
그러나 윤필용사건으로 구속됐던 사람들은 대부분 강창성씨가 사후 자기 합리화를 위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그는 윤장군과 하나회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어요. 하나회 회원의 70%가 영남출신이었고 이들이 윤장군을 따랐기 때문에 강장군이 군의 헤게모니를 잡는데는 둘을 모두 쳐야할 필요성이 있었을 겁니다. 강장군은 윤장군과 더불어 육사8기의 최선두주자였으니까요. 윤장군을 치기 위해 하나회를 친 것입니다. 하나회는 그때문에 억울하게 당했고 그만큼 원한도 컸지요.』
이런 인연으로 79년 12·12 이후 윤장군은 박탈당했던 군적을 되찾고 도로공사 사장으로 재기했다. 반대로 강장군은 신군부에 의해 감옥으로 보내져 삼청교육까지 받는 수모를 겪는다.
당시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L씨의 증언.
『하나회를 뿌리뽑으려 했던 강보안사령관에 대해 전두환씨가 얼마나 큰 원한을 갖고 있었는지 압니까. 「박대통령이 사건수사를 시켰으면 윤장군 한사람만 수사하면 되지 왜 권익현이는 잡아넣는 거야. 내손으로 꼭 혼내줄 것」이라고 말한적이 있었죠. 10·26후 강씨가 전보안사령관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강씨로서는 권력을 잡은 전사령관이 윤장군사건으로 앙심을 품고 있지나 않을까 염려도 됐을 터이지요. 전사령관으로서도 10·26 이후 김재규사건에 대한 군부나 세상 여론을 듣고 싶어했지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두사람이 최규하 당시 대통령 문제를 얘기했대요. 뒤에 들으니까 강씨가 최씨의 하야방법에 관해 뭔가 제의를 했는데,오히려 전씨가 괘씸하게 여겼다는 거죠. 그길로 강씨는 구속되어 2년 5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강씨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증언했다.
『이후락의 꾀에 넘어갔는지,아니면 박대통령이 또 하나의 2인자 거세작전을 폈는지,여하튼 「당신 때문에 경상도장군 씨가 마른다는 불평이 많아」라는 말과 함께 나는 3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됐습니다. 73년 8월9일 대전사령부에 내려와 울분을 삭이고 있는데 며칠후 박대통령이 충남도 시찰차 내려와 만년장 호텔에서 부르더군요. 박종규 경호실장이 밤 11시에 전화를 해 새벽 1시쯤 사복차림으로 은밀히 호텔로 들어오라고 해요.
박대통령은 「궂은 일을 다 시키고 여기에 내려보내 가슴이 아픈데 누가 자네를 무시하는 사람이 없나」라고 해요.
그리고 나서 군단장으로 나갈 기회가 두번 있었는데 박대통령이 끝내 보내지 않더니 1년반 후에 예편시켜 버리더군요. 모셨던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자니 망설여지지만 그는 어쨌든 측근들을 서로 박치기시키며 관리했던 비정한 면이 있었어요.』<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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