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2006년 12월, 좌절과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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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세월은 2006년도 숨가쁘게 달려와 12월 초입에 들어섰다. 매해 맞는 연말이지만 올해는 참으로 짙은 잿빛이다. 1997년 12월 외환위기 이래 이런 12월이 없었다.

북한 핵실험의 구름은 여전히 한반도를 덮고 있다.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 불쌍한 북한 국민은 또다시 길고 춥고 배고픈 겨울을 보내야 한다. 남한에도 추운 사람이 많다. 전세.반지하.옥탑방에 사는 이들과 낡고 좁은 자기 집에서 부대끼는 많은 서민이 너무나 올라버린 집값에 겨울이 더 춥다. 희망이란 난로가 있으면 추위도 버틸 수 있다. 그런데 그들 가까운 곳에 난로가 있는가. 수출 3000억 달러 돌파도 그들에게는 아득히 먼 온기(溫氣)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국민이 지금처럼 의욕을 잃은 적이 없다"고 개탄했다. 정권은 서민의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데 대통령과 여당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다. 집 없는 사람들, 일자리가 없는 이들, 하루살이가 벅찬 소규모 자영업자들…. 이들이 기댈 희망의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살기가 어렵다고 때려부수는 이들도 있다. 나이 어린 전.의경도 서민의 아들인데 시위대는 죽창으로, 쇠파이프로 이들을 내려친다. 택시운전사도, 식당 주인도 다 서민인데 시위대는 길을 막고 판을 엎어버린다. 무엇을, 누구를 위한 시위인가.

2006년 12월 한국 사회는 그렇게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공동체에는 희망이 있다. 말없이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켜내는 다수 시민이 희망이다. 오늘이 어렵다고 좌절하지 않고 내일을 얘기하려는 다수 한국인이 희망이다. 이제 12월이 지나면 대선 국면이다. 여든 야든 서서히 판이 짜여질 것이다. 우리 공동체는 한국사회를 구출할 새로운 리더십을 얘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연말에 사람들이 희망을 갖는 것은 공동체의 온기를 확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을 식모살이.고물장수로 지낸 위안부 할머니가 나라가 준 지원금을 아껴 모아 4000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신문과 방송에 어려운 이웃의 얘기가 실리면 작은 정성을 보태려는 성금과 사랑의 전화가 줄을 잇는다. 수백만원, 수천만원 기부 못지않게 값진 마음들이 서로의 희망을 북돋운다.

12월로 들어서면서 전국 시내 중심가에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마련한 '사랑의 온도계탑'이 섰다. 이웃돕기 모금 수치를 알려주는 탑이다. 모금회에 따르면 연말연시 2개월의 모금액이 연간 액수의 70%가 넘는다고 한다. 어렵고 바쁜 일상 속에서 사그라지는가 싶던 나눔의 아름다운 불씨는 추운 겨울 어김없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대통령도, 아파트 광풍도, 폭력시위도 다 잊고 사랑의 온도계를 쑥쑥 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