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20대도 당한 피싱 수법…경찰 설득 끝에 4000만원 지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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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피해자로 의심되는 사람이 현금 3000만원을 인출하려고 해요.”

지난달 30일 오후 4시쯤, 서울 개봉동의 한 시중은행 직원으로부터 20대 남성이 거액의 현금을 인출하려 한다는 112 신고가 접수됐다. 서울 구로경찰서 개봉지구대 소속 유상준 경사(38)가 동료와 곧바로 출동했다. 4분 만에 은행에 도착한 경찰관들은 은행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직장인 A씨(26)를 발견했다.

A씨는 “사업 자금"이라며 경찰 협조를 거부했다. 하지만 A씨는 이체 대신 굳이 현금을 인출하려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횡설수설했다. 유 경사는 “고령층만 보이스피싱을 당한다는 인식과 달리 최근에는 20·30대 피해자도 적지 않아 더 미심쩍었다”고 말했다.

8일 오전, 보이스피싱 범죄를 예방한 서울 구로경찰서 개봉지구대원들의 모습.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원영 경장, 유상준 경사, 김민혁 순경, 권기동 경위. 이영근 기자

8일 오전, 보이스피싱 범죄를 예방한 서울 구로경찰서 개봉지구대원들의 모습.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원영 경장, 유상준 경사, 김민혁 순경, 권기동 경위. 이영근 기자

유 경사는 짜증을 내는 A씨를 상대로 40분간 설득을 이어갔다. A씨의 동의를 받아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니 통화내역, SNS 메신저 등은 깔끔했다. 유 경사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일이 꼬이는 것 같자 미리 설치한 휴대전화 원격조종 애플리케이션으로 흔적을 모두 지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 경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휴대전화를 샅샅이 뒤졌다. 결국 결정적 증거가 된 검찰 사칭 공문 2장을 발견했다. 범죄를 확신한 유 경사가 A씨에게 검사 사칭 등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수법을 설명했다. 순간 A씨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제야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사실을 납득했다고 한다.

A씨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지난달 29일 서울중앙지검 수사관이라는 사람에게서 대포통장 관련 금융범죄에 연루됐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 시작”이라고 했다. 검찰을 사칭한 보이스피싱범의 지시에 따라 대검찰청 홈페이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자 검사가 전화를 받아 사건을 설명해줬다고 한다. ‘강수강발(강제수신·강제발신)’ 기능이 있는 악성 앱이 휴대전화에 설치되면 수사 기관에 전화를 걸어도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번호로 연결된다. A씨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대검찰청 번호로 연결되는 것을 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 구로경찰서 개봉지구대 소속 유상준 경사(38)는 지난달 30일 20대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자를 40분간 설득해 피해를 예방했다. 이영근 기자

서울 구로경찰서 개봉지구대 소속 유상준 경사(38)는 지난달 30일 20대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자를 40분간 설득해 피해를 예방했다. 이영근 기자

결국 A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지시에 따라 4000만원 대출을 받기까지 했다. 그중 3000만원을 현금으로 인출하라는 지시를 받아 은행을 찾은 것이다. 피싱범들은 그에게 “기밀 수사 중이니 경찰이나 은행원에게도 내용을 절대 밝히면 안 되고 둘러대라”고 일러뒀다고 한다.

구로경찰서는 보이스피싱 피해를 예방한 은행원에게 표창장을 수여할 예정이다. A씨는 “2년을 꼬박 모아야 하는 거액을 지켜준 은행원과 개봉지구대원분들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유 경사는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라며 “수사부서에서 근무할 때 보이스피싱 피해를 봐 극단적 선택을 하는 분을 봐서 마음이 더 쓰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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