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람 전락한 '스트레사 전선'…그렇게 최악의 전쟁 불러왔다 [Focus 인사이드]

중앙일보

입력

독일의 도발과 주변국의 대응

1935년 4월 14일, 이탈리아 북부의 스트레사에 이탈리아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 영국 수상 램지 맥도널드, 프랑스 총리 피에르-에티엔 플랑댕이 모였다. 3국의 수뇌들이 인근 마조레 호수에 위치한 이솔라 벨라의 보로메오 궁전에서 장장 나흘 동안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벌인 이유는 한 달 전인 3월 16일에 있었던 독일 총토 아돌프 히틀러의 재군비 선언 때문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독일의 재군비 선언에 대응하기 위해 스트레사에 모인 프랑스 외상 라발(왼쪽부터), 이탈리아 두체 무솔리니, 영국 수상 맥도널드, 프랑스 총리 플랑댕.

독일의 재군비 선언에 대응하기 위해 스트레사에 모인 프랑스 외상 라발(왼쪽부터), 이탈리아 두체 무솔리니, 영국 수상 맥도널드, 프랑스 총리 플랑댕.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면서 그럭저럭 15년 넘게 유지되던 유럽의 평화가 순식간 막을 내릴 조짐이 보인 것이었다. 일단 외교적으로 설득하겠지만, 독일이 따르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해 제압해야 했다. 당시는 독일이 이제 막 군비 확충을 시작한 시점이었기에 영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가 함께 군사 행동에 나선다면 충분히 독일을 응징할 수 있었다. 그런데 회의에 임하는 각국의 태도가 너무 달랐다.

일단 영국은 미온적이었다. 히틀러가 대단히 위험한 인물임을 정확히 직시했던 외무차관 로버트 반시타트의 노력으로 스트레사 회의가 성사됐기에 일단 참석했으나, 맥도널드는 대독 유화책을 유지했다. 이탈리아는 지난 1934년 독일이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했을 때 전쟁까지도 불사하겠다며 국경에 4개 사단을 전개했었고, 이번 회의를 자국에서 유치했을 만큼 영국ㆍ프랑스와의 연합에 관심이 많았다.

1934년 6월 14일 이탈리아를 방문한 히틀러. 하지만 한 달 후 독일이 오스트리아 강제 합병을 시도했을 때 무솔리니는 군대를 동원하며 반대했다. 이때만 해도 그다지 독일과 친하지 않았다.

1934년 6월 14일 이탈리아를 방문한 히틀러. 하지만 한 달 후 독일이 오스트리아 강제 합병을 시도했을 때 무솔리니는 군대를 동원하며 반대했다. 이때만 해도 그다지 독일과 친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독일을 가장 두려워한 나라였다. 앞장서 베르사유 조약을 주도했고 종전 후 연합군이 라인란트를 점령했을 때 가장 많은 병력을 상주시킨 데다 가장 늦은 1930년 철군했을 정도였다. 이와 별개로 1923년 배상금 연체를 빌미로 루르에 군대를 투입해 점령했을 정도로 독일을 강경하게 대했다. 다만 1930년대 중반이 되자 단독으로 독일을 응징할 능력이 사라졌기에 당연히 회의에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모인 3국을 ‘스트레사 전선(Stresa Front)’이라고 부른다. 일부 학자는 이때가 제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도 주장한다. 그 이유는 1년 후 벌어진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1936년 3월 7일 독일은 비무장 지역으로 설정된 라인란트에 전격적으로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런데 전쟁 우려 때문에 군부가 반발하자 히틀러는 프랑스군이 움직이면 즉각 퇴각하겠다고 동의를 구한 뒤 작전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재군비를 선언한 지 1년이 됐어도 독일군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따라서 스트레사 전선이 즉시 군사 행동에 돌입했다면 나치 정권이 붕괴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바뀐 것은 없었다. 영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는 단지 문서에 “평화 유지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세 나라는 모든 적절한 수단을 동원해 독일의 일방적인 베르사유 조약 거부를 반대한다는 데 합의했다”는 내용만 남겼을 뿐이었다.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로 진입하는 독일군. 그런데 전쟁을 우려한 독일 군부가 반발하자 히를러는 프랑스군이 움직이면 즉각 후퇴하겠다고 설득하고 작전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정도로 당시 독일군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National Archive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로 진입하는 독일군. 그런데 전쟁을 우려한 독일 군부가 반발하자 히를러는 프랑스군이 움직이면 즉각 후퇴하겠다고 설득하고 작전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정도로 당시 독일군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National Archive

결국, 라인란트 점령을 시작으로 독일은 본격적으로 침략에 나섰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전부터 비밀리에 준비했으나, 재군비를 공식 선언한 지 4년 만에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을 만큼 독일군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이를 막을 절호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트레사 전선이 단지 휴양지 유람으로 끝난 이유는 회의에 임하는 각국의 이해타산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회를 놓치다

먼저 영국은 독일과 타협을 원했다. 히틀러가 재군비 선언을 했을 때 정작 영국이 가장 우려한 것은 건함 경쟁이었다. 20세기 초 영국은 독일과 피 말리는 주력함 확보 경쟁을 벌여 우세 유지에 성공했었다. 그러나 초유의 전란을 겪고 국력이 쇠퇴한 뒤에도 계속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워싱턴 군축조약, 런던 군축조약 등을 이끌며 다자간 해군력 확장 자제에 성공했는데, 정작 재군비를 선언한 독일은 조약국이 아니었다.

전함 비스마르크는 영독해군조약에서 규정한 배수량 3만 5000t을 넘긴 등장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다. 이처럼 처음부터 독일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위키피디아

전함 비스마르크는 영독해군조약에서 규정한 배수량 3만 5000t을 넘긴 등장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다. 이처럼 처음부터 독일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위키피디아

그래서 독일의 재군비 선언 석 달 후인 6월 18일 영국은 전격적으로 영ㆍ독 해군조약을 체결하며 독일 해군이 총배수량 기준으로 영국의 35%까지 전력을 증강하는 데 동의했다. 독일의 재군비를 용인한 형국이 되자,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분노했다. 그런데 정작 이탈리아도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단지 스트레사 전선을 이용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가 지지해주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결국, 문제는 독일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였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에 프랑스는 여타 연합국이 말렸을 만큼 독일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그런데 그토록 미워했다는 것은 반대로 두려워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단 인구가 제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독일이 7000여 만이었던 반면 프랑스는 4200여 만이었다. 1930년대 독일의 GDP는 유럽에서 소련 다음이 되었다.

프랑스 파시스트의 주도로 벌어진 1934년 2월 6일 폭동의 모습. 시위 진압 중 17명이 사살되었을 만큼 격렬했다. 독일의 위협이 커지는데도 불구하고 1930년대 프랑스에서 이런 혼란이 일상이었다. 위키피디아

프랑스 파시스트의 주도로 벌어진 1934년 2월 6일 폭동의 모습. 시위 진압 중 17명이 사살되었을 만큼 격렬했다. 독일의 위협이 커지는데도 불구하고 1930년대 프랑스에서 이런 혼란이 일상이었다. 위키피디아

지독하게 목을 졸랐어도 양국의 국력 차이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보다 더 크게 벌어진 것이었다. 당연히 독일이 재무장을 완료하면 이기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더 큰 문제는 항전 의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지난 전쟁으로 무려 한 세대가 사라지고 국경 일대 영토가 초토화됐기에 염전 사상이 퍼진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는데도 불구하고 국론이 극도로 분열돼 있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이 부담스러워할 만큼 프랑스군의 전력이 충분히 앞섰음에도 단독으로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래서 기존 동맹국인 영국ㆍ폴란드 외 이탈리아와도 동맹을 맺고자 했다. 이처럼 각국의 속내가 다르니 처음부터 스트레사 전선은 결과물을 도출할 수 없는 쇼로 끝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작성된 성명서 외에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없다는 것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스트레사 회담 당시 보트를 타고 회의장에 있는 이솔라 벨라에 도착한 프랑스 대표단. 외교장관 피에르 라발(우)은 비시 정권에서 행한 친독 매국 행위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유튜브 캡처

스트레사 회담 당시 보트를 타고 회의장에 있는 이솔라 벨라에 도착한 프랑스 대표단. 외교장관 피에르 라발(우)은 비시 정권에서 행한 친독 매국 행위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유튜브 캡처

보통 동맹이라면 한배에 탄 공동운명체라고 부른다. 그런데 스트레사 선착장에서 회의장이 있는 이솔라 벨라로 갈 때 함께 유람선을 타지 않고 나라별로 각각 작은 보트를 이용했을 때부터 어쩌면 이들은 함께 할 운명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독일을 막기 위해 모였지만 정작 의도했던 목적이 달라서 후속 조치 없이 미적거렸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 결과 세계사는 다 알다시피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