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범죄구조금 받았다고 범죄자 형량 깎아주는 모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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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감경 요인인 ‘피해 회복’을 구조금에 기계적 적용해

반성·합의 전제돼야…막무가내 공탁도 감형 제외를

범죄 피해자들이 범인이 감형받을 것을 우려해 국가에서 주는 범죄피해자구조금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예상치 못한 범죄로 죽거나 다친 것도 억울한데 국가의 구조금을 받았다고 범죄자의 형량을 깎아주는 것은 평범한 시민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해 8월 발생한 분당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은 범죄피해자구조금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당시 이 사건으로 2명이 숨지고 12명이 다쳤다. 범인 최원종은 구속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가 혹시 형량을 깎아줄까 봐 피해자들이 구조금 신청을 기피하는 것이다.

대법원의 살인죄 양형 기준에 따르면 피해자의 ‘처벌 불원이나 실질적 피해 회복’은 특별 감경 요인, ‘상당한 피해 회복’은 일반 감경 요인이 된다. 피해 회복에는 공탁도 포함된다. 이런 규정을 둔 것은 피고인이 신속하고 실질적인 피해 회복에 나서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구조금이나 보험금을 받으면 나중에 국가나 보험사가 피고인에게 구상금을 청구하게 된다. 결국 피고인 주머니에서 돈이 나간다는 이유로 판사들이 이를 피해 회복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고 있다. 올 2월에도 인천지법은 술집에서 시비 끝에 옆 좌석 손님을 때려 숨지게 한 50대 남성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면서 유족이 범죄피해자구조금을 받은 점을 감형 사유 중 하나로 적시했다.

정작 범인은 반성이나 피해 보상을 통해 합의할 노력도 하지 않는데, 국가가 구호 차원에서 준 돈을 받았다고 피해가 회복됐다며 감형해 주는 조치는 피해자와 유족에게 또다시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법무부는 이런 관행이 부당하다고 판단해 구조금 지급 후 구상금 청구를 판결 확정 때까지 미루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금전 수령을 피해 회복으로 인식하는 법관들의 기계적인 법 적용 관행이 바뀌지 않는다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면 대법원이 양형 기준을 고쳐, 범죄피해자구조금과 보험금은 감경 요인으로 적용하지 않도록 강제해야 한다.

또 공탁을 감형 요인으로 판단하는 규정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형사 법정에선 피해자가 합의를 거부하는데도 피고인 측이 선고 직전에 합의금을 공탁하고 감형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심지어 피해자가 수령을 거부한 공탁금을 형이 확정되자 피고인이 몰래 빼간 사례도 있었다. 금전 보상이 감형 사유가 되려면 가해자가 깊이 뉘우치고 피해자가 용서해 주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피해자 마음에 상처가 여전한데 어찌 피해가 회복됐다고 간주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