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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간절히 바라옵건대…” 호암미술관에서 만난 옛 여성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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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전 겁(劫)의 불행으로 인해 여자의 몸을 받았습니다. 다음 생애는 남자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고려시대 한 여성이 빌었던 소원입니다. 1345년 진한국대부인 김씨(辰韓國大夫人 金氏)가 사경 『감지금니 묘법연화경』을 조성하며 발원문에 남긴 내용입니다.

당시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한탄한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청양 장곡사 금동 약사여래 좌상에서 발견된 발원문(1346)에는 한 여성이 “나이가 찬 여성들이 남성이 되게 해달라”고 비는 내용도 나옵니다. 당시 불교에선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기에, 이들은 “다음 생에는 남성으로 태어나 성불하겠다”고 다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뿐일까요. 다음 생에는 여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여러 일에서 벗어나겠다는 바람도 간절했을 것입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소형 금동 불상군 중 일부. 높이 12㎝. 1628년 인목왕후가 발원해 제작했다. [사진 호암미술관]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소형 금동 불상군 중 일부. 높이 12㎝. 1628년 인목왕후가 발원해 제작했다. [사진 호암미술관]

지금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6월 16일까지, 유료)은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묻혀 있던 그들의 목소리를 전해줍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불교 미술의 걸작 92점을 소개하며, 한·중·일 세 나라에서 발전해온 불교미술을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봅니다. 이전에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매우 신선한 접근입니다.

조선시대 아들 명종(1534∼1567)을 대리해 수렴청정했던 문정왕후(1501∼1565)는 불교미술의 열렬한 후원자였습니다. 1565년 양주 회암사 중건 기념으로 불화 400폭을 제작해 전국 사찰에 배포했습니다.

한편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의 한 탑에서 나왔다는 20개의 소형 금동불상군(金銅佛坐像)은 특유의 맑은 표정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1584~1632)가 이 불상 제작을 추진한 주인공입니다. 그가 대비의 자리에서 폐위됐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위된 후 많은 불사를 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번 전시작의 절반이 넘는 47건이 해외에서 처음으로 들어왔습니다. 특히 일본과 독일로 흩어져 있던 15세기 한국 불화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이번에 처음 나란히 보였지만, ‘석가탄생도’는 오는 일요일(5월 5일)까지만 전시되고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이승혜 삼성문화재단 책임연구원은 “불상이나 불화의 발원문엔 여성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공식적인 불교 문헌에서 볼 수 없는 여성들이 그 안에 있다”며 “작품의 아름다움과 함께 금빛 광채 너머 존재했던 옛 여성들의 존재를 돌아보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이 전시를 볼 계획이라면 이어폰을 꼭 챙겨 가시기를 추천합니다. 작품에 얽힌 이야기는 휴대폰에 앱을 다운 받아 상세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어렵게 보이던 불화가 흥미진진한 우리네 사람 이야기로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