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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에도 산화하는 사람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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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국민의힘으로 광주 출마한 내과의사 박은식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8.62%.

4·10 총선에서 국민의힘 소속으로 광주 동·남을에 출마한 박은식 전 비상대책위원의 득표율이다. 더불어민주당 안도걸(70.16%), 무소속 김성환(16.15%) 후보에 이어 3등에 그쳤다. 세브란스 병원 내과 의사였던 그는 비례대표를 주겠다는 당의 제안을 뿌리치고 패배가 뻔한 고향에서 출사표를 던졌다. 동·남을은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 문충식 후보가 한자리 득표율로 낙선한 데 이어 2020년 총선에선 미래통합당이 공천을 포기한 불모지 중 불모지다.

‘달걀로 바위 치기’였던 건가요.
“부족한 제가 두 달 만에 고향 광주의 마음을 얻으려 했는데, 욕심이 과하지 않았나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선거비용 보전 기준인 15%는 넘겨 동생뻘 청년들이 보수 후보로 광주에 도전할 자신감을 주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상대 당에 표 안 주기는 영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민주당은 대구·경북에서 30%, 부산·경남에선 40% 표가 나와요. 부산·울산·경남에서 5석 얻었잖아요. 여기처럼 9 대 1 구도면 정치가 존재하기 힘듭니다.”

‘총선서 보수 지면 망국’ 위기감에 고향 출사표 결심
보수 후배들 길 열어주려 강남·비례 출마 제안 거절
호남서도 여당 존재감 키워야…5·18 매도 이제 그만
지역 유권자도 보수에 최소한의 관심 보여주셨으면…

국민의힘을 상징하는 붉은 점퍼 차림으로 유세 도중 인터뷰에 응한 박은식 전 후보. 그는 “등 뒤의 건물 벽처럼 견고한 호남 정서를 넘지 못했지만, 여당에도 대의를 위해 산화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택한 길인 만큼 후회는 없다”고 했다. 강찬호 기자

국민의힘을 상징하는 붉은 점퍼 차림으로 유세 도중 인터뷰에 응한 박은식 전 후보. 그는 “등 뒤의 건물 벽처럼 견고한 호남 정서를 넘지 못했지만, 여당에도 대의를 위해 산화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택한 길인 만큼 후회는 없다”고 했다. 강찬호 기자

선거 운동, 어떻게 했나요.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뛰었습니다. 출퇴근 인사하고, 경로당 찾아다니며 ‘40년간 민주당만 찍어 좋아진 게 뭐 있나. 인구(142만)마저 대전(144만)보다 줄어 광역시 타이틀을 뺏길 판이다. 여당 찍어야 예산이 온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르신들은 ‘윤석열 꼴 보기 싫다’는 말만 하세요.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해도 ‘됐어. 그래도 민주당이야’ 하세요. 사전 투표 때도 힘들었어요. ‘난 민주당 찍고 왔어’ 하시니 기운 빠지죠. 여기 민주당 후보들은 공천되면 휴가 간다고 해요. 경선 끝나면 선거 끝난 거예요.”
대통령 욕에 뭐라고 답했습니까.
“국회 가서 대통령에 할 말 할 테니 찍어달라고 했죠 (웃음). 저도 솔직히 의·정 갈등 못 푸는 것 보면서 (대통령에) 약간 실망했어요. 또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 이종섭을 대사로 보내나요. 물가도 그래요. 국민도 정부 탓만은 아닌 걸 아는데 굳이 ‘대파’ 논란을 만들 필요가 있었냐고요.”

첫 여론조사 5% 지지율에 경악

힘들었던 기억이 많았을 것 같은데.
“명함 받으면 내던지고 찢거나, 침 뱉고 ‘비켜’ 하는 분들이 있었지만 손 꼽을 정도였죠. 정말 힘들었던 건 지지율이 5%로 나온 첫 여론조사 때였습니다. 멘탈이 흔들리더라고요. (편 들어준 사람은 없나요?) 하루 많으면 7명 정도였습니다. ‘우리도 바뀌어야 해. 찍어줄게’ 하시더라고요. 참 고마웠죠.”
당 전략의 문제점은 뭐였나요.
“선거는 바람이잖아요. 언론의 주목을 받는 후보가 저 외에 광주, 전남·북에서 5명씩은 있어야 했어요. 그나마 ‘한동훈 바람’을 기대했는데, 불 뻔하다 꺼져버렸고…. 어젠다도 실종됐어요. 586 청산? 이재명이 알아서 청산했잖아요. 민생? 대통령이 대파 흔드는 순간 종쳤죠. 이명박 정부 때 ‘뉴타운’처럼 보수 가치에 충실한 카드 하나만 던졌더라도 좋았을 텐데….”
낙선하니 주변에서 뭐라고 하나요?
“‘여당 비대위원이 꽃길 마다하고 왔는데 너무하다’ ‘여기는 여당의 희망이 없는 곳’이라고들 하시더군요. 서운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지해준 많은 분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지금 광주에선 ‘야권이 대통령 탄핵선(200석) 얻지 못해 아깝다’는 분위기예요. 막판에 영남이 국민의힘으로 결집한 건 호남에서 이정현·정운천조차 안 되니까 ‘우리도 여당으로 뭉치자’는 심리가 작동했기 때문 같습니다.”

“한나라당 호칭 여전, 여당 존재감 0”

여당도 5·18 참배 등 제스처를 하지만, 진정성이 안 보인다는 지적을 받지 않나요.
“국민의힘도 잘해야겠지만, 광주 유권자들도 생각을 바꿨으면 합니다. 5·18을 기념일로 지정한 대통령은 김영삼이었잖아요. 국민의힘도 이번 총선에서 호남 전 지역구에 후보를 냈고요. 집권당을 활용해야지, 배척만 하면 계속 고립되죠. 선거해보니 대권이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제가 아무리 뛰어봤자 ‘윤석열 싫어! 꺼져’ 하면 끝이에요. 명함 드리면 ‘왜 빨간 당으로 나왔냐’고 하세요. 당명도 기억 못 해요. 국민의당, 심지어 한나라당이라고 하는 분도 있어요.”
잊을 만하면 5·18 망언이 여권에서 나오는 것도 문제 아닌가요.
“5·18 때 광주 시민은 ‘북괴는 오판 말라’는 플래카드를 걸었고, 미국의 개입을 바라는 등 헌정 수호·친미 시위를 했어요. 그런데도 북한군 개입설을 퍼뜨리고 ‘폭도’라 매도하니 대화 자체가 안 돼요. 이게 지속되니 호남이 여당에 정서적으로 가까워지기 힘들고, 민주당에 반대하는 광주 시민들이 국민의힘 아닌 조국 신당으로 가버렸어요. 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개혁당 찍은 비율이 여기가 제일 높아요. 답답합니다.”
광주 출마에 가족들 반응은.
“지난해 김기현 대표가 혁신위원장 맡아달라고 했지만 거부했어요. 가족들 반대가 심했죠. 당에서 ‘비례 의원 아니면 텃밭(강남) 공천해 주겠다’라고도 했지만, 그것도 거부하고 ‘정치하게 된다면 광주 출마하겠다’고 했어요. 이어 비대위가 출범하면서 한동훈 위원장이 비대위원직을 제안했는데, 이건 가족들도 동의해줬어요. 보수진영에서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때 광주 출마 결심을 굳혔죠.”
꽃길을 거부하고 험지 출마를 결단한 이유는.
“누군가는 산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여당 사람들이 자극받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죠. 이 당은 호남 출신들이 고향 대신 양지만 찾아 출마하잖아요. 그러다 낙선해 명분도 실리도 잃고…. 호남 출신으로 자존심 상하죠. 그래서 비대위원 맡는 순간 내 소명은 광주 출마라고 확신했습니다. ‘박은식이 비대위원 되더니 결국 비례 공천받더라’는 말 듣고 싶지 않았죠. 내가 광주에 출마하면 여당의 수도권 득표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도 있었고요.”
의사로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고행길을 택한 심적 배경은 뭔가요.
“‘총선에서 여당이 지면 나라가 망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있었어요. 사회과학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보수의 가치에 확신을 갖게 됐고, 한국은 해양세력 주도의 자유시장 경제로 가야지, 중국에 굴종하던 과거로 돌아가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 출마를 결심한 거죠.”
망국을 걱정할 만큼 절박했나요.
“과거 민주당은 그래도 헌정사는 존중했는데, 지금의 민주당은 나라에 애착심 자체가 없다고 봤어요. 나라에서 꿀 빨 거 다 빨고, 아이들 미국 유학 보내면서 사상은 사회주의·친북·친중이니, 애착심이 없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이 또 권력 잡으면 대륙에 종속됐던 조선 시대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광주 출마로 이어진 거죠.”

“박정희 덕에 기생충 소멸” 듣고 보수로

성장사가 궁금합니다.
“아버지는 무안 출신 대학 강사, 어머니는 화순 출신 교사로 광주에서 사셨어요. 저도 초중고를 광주에서 나왔고요. 유복하진 못했지만 단란한 가정이었죠. 처가는 대구인데, 장인어른이 자식들과 5·18 묘지를 참배했을 만큼 열린 분입니다. 어릴 때는 당연히, 그냥 민주당이었죠. 한데 의대 입학해 기생충학을 배우는데, 교수님이 ‘박정희가 기생충 다 없애 우리 일자리가 없어져 버렸다’고 하시더라고요. 옛날엔 오물이 그대로 들어간 우물물 먹고 너도나도 기생충에 감염됐잖아요. 이거 막으려면 하수도 깔아야 해요.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 수교의 배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자재를 마련하고 하수도를 만들게 하니까 기생충 유병률이 확 떨어진 겁니다. 그때 처음 박정희의 긍정적인 면모를 깨달았어요. 또 의사가 돼보니까, 누군가 일을 해 가치를 창출해야 분배도 가능하다는 걸 알았죠. 최전방에서 군의관 복무하며 북한군의 현실을 목도하고, 보수 이념이 잘못된 게 아니란 확신을 얻었습니다.”
보수 논객이 된 건 조국 사태가 전환점인가요?
“제 전문 분야잖아요. 조민 씨가 썼다는 의학 논문은 레지던트도 못 써요. 교수가 박사 조교들 데리고 피 뽑고, 동의서 얻고, 기계 돌려야 겨우 쓸 수 있어요. 그런 논문을 고교생이 썼다니 진짜 분노했죠. 그런데도 문제없다고 넘어가는 민주당 보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선거비용을 한 푼도 보전받지 못했는데 어려움은 없나요.
“후원금이 1억5000만원 들어와 큰 손해는 면했습니다. (거취는?) 일단 일상으로 돌아갈래요. 가정을 건사해야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