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문태준의 마음 읽기

정원과 석류 화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제주에는 신록의 연둣빛이 눈부시다. 산빛은 해가 뜨는 아침에도 산뜻하고 잔양(殘陽)에도 그러하다. 수풀은 어떻게 이처럼 신선한 색채로 스스로를 곱게 꾸밀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 새잎을 보고 있으면 내게도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꿈틀거리고 싹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제주 출신의 문충성 시인이 시 ‘제주의 새봄’에서 “연둣빛 새봄이 와요 새봄이/ 잎 떨린 나뭇가지마다/ 물새들 물고 온 새 소식들 투욱 툭 전하면/ 소리 없이 연둣빛 웃음들 터뜨려요/ 그 웃음소리/ 바닷가에서/ 들판으로 들판에서/ 산으로 오롯 오롯/ 퍼져나가죠 연둣빛 그 웃음소리”라고 흥겹게 노래한 바로 그 신록의 세상이다.

새봄 신록에 연둣빛 웃음소리
누구나 부지런해지는 계절
시간과 정성이 아름다움 빚어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활짝 핀 꽃 앞에 앉아 가만히 꽃을 바라볼 때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랍기만 하다. 금낭화는 금낭화대로 튤립은 튤립대로 특유의 모양과 빛깔로 자신만의 고유한 꽃을 피워내니 경이롭고, 또 해마다 제때에 그 자리에서 그 꽃을 피워내니 신기할 따름이다.

들판에는 청보리밭이 펼쳐져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른 보리가 일렁인다. 마치 저 먼 곳에서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오는 것처럼.

해는 점점 일찍 뜨고 해는 점점 늦게 진다. 낮에는 송홧가루가 바람에 날리고, 밤에는 소쩍새가 운다. 시골이라 개구리 우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럴 때면 밤의 허공이 올록볼록하다. 낮의 시간이 길어지니 게으른 사람도 부지런해진다. 동네 사람들의 손에는 호미며 곡괭이가 쥐어져 있고, 정원이며 밭에 나가서 일을 하느라 바쁘기만 하다. 나도 조금은 덜 꾸물거리게 되었고, 조금은 더 몸을 놀려 움직이게 되었다. 챙이 크게 달린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고, 목에 수건을 두르고선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또 화단을 가꾼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혔다.

요즘 알게 된 것이지만, 제주에는 묘목과 화초를 파는 농원이 참 많다. 집집마다 꽃과 나무가 자라는, 크고 작은 정원이 있고, 또 정원을 아주 근사하게 잘 가꾸기 때문일 테다. 모두가 정원사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집 안뜰 꽃밭에만 꽃을 심는 것이 아니라 집을 에두른 돌담 바깥에도, 동네 공터에도 꽃을 심어 기른다. 내 이웃집 부부도 묘목과 화초를 재배하는 일에 대해 훤하게 알고 있다. 나는 종종 이런저런 귀동냥으로 배우게 되는데, 며칠 전에는 꽃이 진 수선화 꽃대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었더니, 꽃대는 지금 잘라주고 잎은 다 마른 후에 잘라주면 알뿌리가 실해진다고 일러주었다.

어느새 나도 집에서 가까운 농원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봄을 맞아 묘목을 몇 그루 사기 위해 농원을 찾아갔다. 블루베리 묘목 여럿과 한라봉 묘목 여럿을 사서 돌아왔다. 밭에는 한라봉 나무 십여 그루가 자라는데 지난 겨울 한파에 네 그루가 고사하고 말았다. 밭에서 여러 해를 자랐고 그래서 해마다 잘 익은 열매를 얻었는데 네 그루씩이나 죽었으니 여간 아쉽지 않았다. 어린 묘목을 심어서 예전 그 나무만큼의 키와 품으로 키우려면 또 여러 해가 지나야 할 것이다.

한라봉 나무는 말라 죽었지만 그 뿌리는 엄청나게 컸고 땅속으로 깊숙이 뻗어 있었다. 죽은 한라봉 나무의 뿌리를 곡괭이로 캐내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동네 어른 한 분이 지나가다 내게 말했다. “이따 내 집으로 잠깐 와요. 내가 한참 전에 약속은 해 놓고 아직 주지 못한 것이 있어서요.”

농원에서 사 온 한라봉 묘목을 심고 나서 그 어른 집엘 찾아갔다. 어른은 집터에 딸린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밭에 들어서며 헛기침을 한 차례 한 후 말했다. “과일나무를 아주 잘 키우셨네요. 요즘 밭일이 많으시지요?” 어른은 소맷자락으로 땀을 훔치며 “이젠 힘에 부치지 않을 정도로만 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곤 밭 한쪽에 있던 석류나무 화분 하나를 내게 건넸다. “석류나무 묘목을 나눠주겠다고 말을 해놓고 여태 주지 못했는데, 이게 이래 봬도 두 해를 키웠어요.” 화분에서 키운 어린 묘목이었지만 뿌리를 잘 내렸고, 줄기와 가지가 곧게 서고 잘 뻗어 있었다. 나는 거듭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두 해라고 하셨지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요, 거기에 내내 마음과 일손을 썼을 것을 생각하니 화분을 받아 안을 때에 가슴이 뭉클했다. 게다가 애초부터 잘 길러서 내게 주려고 마음을 먹고 시작하신 일이었으니 거기에는 노심초사하는 때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폭염과 비바람과 한파도 여러 번 지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석류나무 묘목에는 그 어른의 따뜻한 배려심과 정성이 온전히 깃들어 있었다.

이즈음에 봄의 정원과 산빛이 보여주는 꽃과 신록이 더없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아껴 가꾼 것이요, 시간을 오래 들인 것이기 때문일 테다. 그 어른은 내게 준 석류 화분을 통해 이 가르침을 한 번 더 알려주셨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