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보러간 기시다, 트럼프에 윙크? 미국 내 日공장 돌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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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미국 건국 250주년을 축하하는 250그루의 벚꽃 묘목, 지진 피해지인 노토(能登)반도의 전통 옻칠 공예품 와지마누리(輪島塗) 커피잔, 닌텐도 게임 수퍼마리오의 굿즈(기념품)… 일본 총리로서 9년 만의 미 국빈 방문을 마치고 14일 귀국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에게 준 선물 목록이다.

카말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왼쪽)과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이 11일 워싱턴 DC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의회 합동연설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AFP=연합뉴스

카말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왼쪽)과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이 11일 워싱턴 DC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의회 합동연설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AFP=연합뉴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정말 기뻐했을 만한 ‘선물’은 따로 있다. “오늘의 우크라이나는 내일의 동아시아가 될 수도 있다”는 기시다 총리의 발언이다. 기시다 총리는 10일(미 현지시간) 바이든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 이어 11일 상·하원 합동연설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사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기시다가 종종 국제무대에서 썼던 문장이다. 우크라이나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중국의 위협에 대처하지 못하면 동아시아도 유사한 사태를 겪을 것이란 경고를 담았다. 일본의 방위비 증액, 안보 역할 확대 정책과도 연관이 있다.

미·일 관계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이 발언은 기시다 총리의 평소 메시지 중 바이든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요청한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안은 공화당의 반대로 몇 달째 미 하원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중국 경계론은 민주·공화 양당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그래서 공화당 의원들을 향해 중국 경계론과 우크라이나 지원을 연계한 발언이 나온다면 바이든 대통령에게 도움될 것이란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한다.

일본 기시다 총리가 9일 미국 바이든 대통령에게 다양한 선물을 주고 있다.일본 내각 홍보실 제공

일본 기시다 총리가 9일 미국 바이든 대통령에게 다양한 선물을 주고 있다.일본 내각 홍보실 제공

소식통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측의 이런 기류가 간접적인 경로로 일본 정부에 전달됐고,기시다 총리는 이에 호응했다. 중국과의 대결을 전면에 걸고 미·일 동맹 강화, 한·미·일 다자간 외교를 적극 추진해온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을 바라는 일본의 속내가 묻어났다.

그렇다고 일본이 바이든 대통령에만 ‘올인(All-in)’ 하는 건 아니다. 12일 기시다 총리는 도요타의 자동차 배터리 공장, 혼다의 비즈니스 제트기 공장 등 노스캐롤라이나주(州)에 있는 일본 기업 공장을 잇따라 방문했다. 이를 두고 일본 외교가에선 "기시다 총리가 이른바 '모시토라(もしト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일본 기업이 맡은 역할을 설명하려 했다"는 말이 나온다.

재임 당시 대일 무역적자 등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의식해 일본 기업들이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행보란 설명이다. 모시토라는 일본어로 '혹시'라는 뜻의 ‘모시’와 트럼프의 일본식 표기인 ‘토람푸(トランプ)’의 앞 두 글자를 조합한 말로 ‘혹시 트럼프가 당선된다면’이란 의미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12일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혼다의 비즈니스 제트기 공장을 방문하고 있다.일본 내각 홍부실 제공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12일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혼다의 비즈니스 제트기 공장을 방문하고 있다.일본 내각 홍부실 제공

기시다 총리는 지난해 10월 야마다 시게오(山田重夫)를 주미대사로 임명하는 등 일찌감치 모시토라를 대비한 ‘트럼프 라인’ 구축에 나섰다. 일본의 주미대사는 외무성 서열 2위이자 관료 톱인 사무차관을 거쳐 가는 경우가 많은데, 서열 3위인 외무심의관 야마다를 발탁했다.

트럼프 재임 당시 일본 총리실 내 국가안보국의 심의관이었던 야마다는 매슈 포틴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태담당 선임보좌관과 매일 수시로 통화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특별한 용건이 없을 때도 전화를 걸어 ‘오하요 고자이마스(おはようございます)’라고 아침인사를 건네며 소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2018년 트럼프가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했던 ‘북미 정상회담 판문점 개최’와 종전 선언에 관심을 보이자, 반대 입장인 일본이 트럼프를 설득해 싱가포르로 개최지가 변경됐고 종전 선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를 주도한 게 야마다-포틴저 라인이었다.

2016년 11월 아베 신조 총리가 도널드 토럼프 당선인과 악수 하고 있다. 일본 내각 홍보실 제공

2016년 11월 아베 신조 총리가 도널드 토럼프 당선인과 악수 하고 있다. 일본 내각 홍보실 제공

일본이 트럼프 재선 대비에 서두르는 건 2016년의 경험 때문이다. 당시 미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당선을 의심치 않았던 일본은 트럼프와의 관계 구축에 미흡했다. 예상과 딴 판인 결과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뉴욕의 트럼프 타워로 직접 찾아가 당선인 신분인 트럼프를 만났다. 오마바 대통령에겐 외교 결례가 될 수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고 선물로 줄 골프백까지 챙겨갔다.

다만 저돌적인 스타일의 아베 전 총리와 달리 기시다 총리의 접근 방식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신중한 스타일의 기시다 총리는 국회에서 단정적인 표현을 피하려 ‘검토’란 단어를 자주 써 ‘검토사’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일본 내에선 아직은 ‘호보토라(ほぼトラ·트럼프 재선 거의 확실)’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앞선다. 이 때문에 당분간 한 손은 바이든에, 다른 한 손은 트럼프에 내미는 양상이 계속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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