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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반도체, 봄날 왔지만 고민…수백조 투자 '타이밍 눈치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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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사진 삼성전자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사진 삼성전자

반도체 업황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업계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천문학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투자 규모 때문이다. 국내에 이어 미국에서도 공장 건설에 당장 수십조 원 규모의 추가 투자를 집행해야 하는 상황이라 최적의 투자 시점을 찾기 위한 기업 간 눈치싸움이 치열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5일(현지시간) 소식통을 인용해 삼성전자가 이달 15일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대한 총 투자 규모를 기존의 2.5배 이상인 440억 달러(약 60조원)로 늘려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2021년 테일러 공장에 170억 달러(약 22조6000억원)의 투자 계획을 발표하고 반도체 파운드리 팹(위탁생산 공장)을 건설해왔는데 여기에 투자를 더 늘린다는 것이다. 보도대로 삼성의 투자가 확대된다면 대만 TSMC의 투자 규모(400억 달러)를 넘어서게 된다.

대규모 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일대 모습. 연합뉴스

대규모 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일대 모습. 연합뉴스

삼성이 짓고 있는 테일러 팹은 올해 안에 완공될 예정이다. 투자 확대시 삼성은 여기에 인공지능(AI) 칩 생산을 위한 첨단 패키징 공장을 추가할 가능성이 크다. 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미 정부는 삼성의 추가 투자 규모에 따라 삼성에게 배정할 보조금을 확정하는 안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15일 블룸버그통신은 미 상무부가 삼성전자에 테일러 공장 외 추가 투자 논의와 함께 보조금 60억 달러를 지급하기로 ‘잠정 합의’를 마쳤다고 보도한 바 있다.

SK하이닉스도 최근 미 인디애나주에 AI 메모리용, 즉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기지를 짓기로 확정했다. 총 38억7000만 달러(약 5조2000억원)가 투자될 예정이다. 앞서 삼성과 TSMC의 사례처럼 건설 과정에서 총 투자 금액이 장기적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도 크다. ‘공짜 보조금은 없다’는 미 정부의 입장이 확고한 만큼 앞으로도 추가투자의 압박이 커질 것이라는 게 반도체 업계에서의 분석이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으로 건설비도 치솟고 있다.

투자 계획, 너무 많이 펼쳤나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미국 정부의 칩스법 ‘보조금 공세’에 화답하듯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막대한 투자를 집행하고 있지만, 고민과 우려의 분위기도 읽힌다. 반도체 업황이 살아나면서 올 1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실적 반등에 성공했지만 지난해 적자 폭이 컸던 점을 감안하면 수백조 원의 투자를 속도 조절 없이 할 수 있겠냐는 현실적 고민이다. 삼성전자 공장 건설협력사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투자 우선순위를 다시 조정하는 단계로 알고 있다”면서 “일정부분 속도 조절이 불가피할 것”이라 말했다.

양사는 경기도 용인에 초대형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기로 발표한 상태로 오는 2027년부터 첫 가동이 시작된다. 이곳에만 향후 20년간 삼성전자가 360조원을, SK하이닉스가 120조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반도체는 타이밍의 예술

SK하이닉스 청주공장 전경. 사진 충청북도

SK하이닉스 청주공장 전경. 사진 충청북도

반도체 산업은 대규모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이 동시에, 적기에 이뤄져야 한다. AI칩이나 HBM 사례가 그랬듯, 적정 투자 시점을 놓치면  기술 주도권을 뺏기는 것은 물론 시장 판도도 순식간에 뒤집힐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과 국내 공장 증설의 우선 순위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고 그 진폭이 큰 반도체 사업은 타이밍의 예술이라 불릴 만큼 적시 투자 결정이 중요하다”라며 “한순간에 수십조 원이 좌우되는 만큼 꼭 미리 정해둔 시간표에 맞춰 움직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양사 합쳐 45조원 가까이 쌓여 있는 메모리 반도체 재고 자산도 부담이다.

이에 삼성전자는 평택캠퍼스에 짓고 있는 P4(4공장)·P5(5공장) 건설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당장 가동률이 높지 않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보다는 호황기에 진입한 AI 반도체 생산라인을 먼저 건설하는 식으로 시장 변화에 대응하는 방안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SK하이닉스 역시 청주캠퍼스 내 신공장인 M15X 공사 재개 시점을 신중하게 검토 중이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당장 차세대 HBM부터 설계의 변경 폭이 커지기 때문에 칩 생산방식도 크게 바뀔 수 있다”며 “시설투자를 둘러싼 변수가 더 늘어나 반도체 기업들의 고민이 클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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