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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든 정원, 한국 산천…50년 조경 작업의 교과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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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 한국 전통 정원의 운치를 풍부하게 살렸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 한국 전통 정원의 운치를 풍부하게 살렸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67년 전, 그는 국어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대구기독교학교 사택에 살았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학교 정원 가꾸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접했고, 고등학생 땐 온실을 맡아 관리했다. 학창 시절 백일장을 휩쓸었지만, 펜 대신 풀과 나무, 꽃으로 시를 쓰는 삶을 살았다.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83)씨다. 수많은 공원과 수목원이 그의 손을 거쳤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와 아시아공원(1986), 예술의전당(1988), 여의도 샛강생태공원(1997), 호암미술관 희원(1997), 선유도공원(2001), 경춘선 숲길(2015~2017) 등이다.

정영선

정영선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전시 ‘정영선: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9월 22일까지)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5일 개막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조경 전시다. 대전엑스포 등 국가 주도 공공 프로젝트,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 등 민간 프로젝트, 수목원, 식물원 등 작업 주제와 성격에 따라 7개 묶음으로 나눠 소개한다. 현장을 직접 보여줄 수 없는 전시 특성상 청사진 등 설계도면, 수채화 그림, 모형, 영상, 사진 등 기록 자료 500여 점을 전시한다. 지난 4일 작가는 “조경 분야는 그냥 건축의 뒷전 정도로만 알려져 왔는데 제가 후배들을 위해 앞으로 길을 마련할 기회라 생각해 창피하고 부끄럽지만, 기꺼이 나섰다”고 소감을 밝혔다.

2011년 미국 뉴욕주 허드슨강 상류에 자리한 원불교 명상원 ‘원다르마센터’. [사진 원다르마센터]

2011년 미국 뉴욕주 허드슨강 상류에 자리한 원불교 명상원 ‘원다르마센터’. [사진 원다르마센터]

서울대 농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3년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1회 입학생이다. 대학원 졸업 후 청주대 조경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충북 공원묘지 계획(1977)으로 실무를 시작했고, 1980년 여성 1호 국토개발기술사(조경)가 됐다. 탑골공원 개선사업(2002)과 광화문광장 재정비(2009) 등은 그가 공간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기여한 작업이다. 플랫폼과 철길 등 근대 산업시설과 인근 숲은 보존하고, 공원은 주민들의 일상 공간으로 조성한 경춘선 숲길 프로젝트는 도시 재생과 지역 활성화를 이끈 모범 조경 사례로 꼽힌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와 아시아공원, 대전엑스포 등은 공공 프로젝트로 발전된 도시의 비전을 보여준 예다. 예술의전당과 휘닉스파크(1995)는 경제 성장으로 늘어난 여가활동의 장소에서 조경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마당에 조성된 정원.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마당에 조성된 정원.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97년 용인 호암미술관 정원인 희원 조성 작업은 그에게 최대 전환점이었다. 대학원생 시절 창덕궁 후원을 드나들며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탐구했던 그는 이곳에 비로소 석단·정자·연못·담장 등 전통 요소를 본격적으로 구사했다. 특히 지형의 높낮이를 자연스럽게 살리고, 요소들이 서로를 숨겨주고 드러내도록 유연하게 연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 자생 화초와 신라 석탑 등 무심하게 놓인 듯한 석조물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가 맡은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은 도심 한강변 중 자연성이 강한 곳으로, 선유도공원은 도시 산업화의 흔적을 자연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곳으로 꼽힌다. 서울아산병원 녹지공간(2007)과 미국 뉴욕주 허드슨강 상류에 지어진 종교시설 원다르마센터(2011)는 자연의 심신 치유력을 극대화한 프로젝트로 눈길을 끈다.

다양한 기록 자료를 바닥에 설치한 전시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다양한 기록 자료를 바닥에 설치한 전시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전시 작품 중 관람객이 직접 볼 수 있는 조경 작품도 있다. 미술관 안 전시 마당과 뒤편 종친부 건물 앞에 작가가 조성한 두 개의 정원이다. 낮은 언덕을 만들고 돌을 여기저기 흩어 놓고 야생화를 곳곳에 심어 관람객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도록 했다. 이지회 학예연구사는 “작가의 ‘꾸안꾸’(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모습) 미학이 녹아들어 있다. 전시가 이어지는 6개월 동안 시간이 흐르며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두 개의 정원은 향후 3년간 미술관 공간을 지킨다.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볼까. 그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을 거듭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등에 나오는 말로,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본래 백제 예술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말이지만, 한국 정원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에도 들어맞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우리 산이 바로 내 작업의 교과서였다”며 “한국의 산천이야말로 신이 만든 정원이자 천국”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제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천국을 못 알아보고 마구잡이로 개발하며 망치고 있는 것”이라며 “이번 전시가 그 난개발을 막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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