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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성범죄 피해자의 탄원서, 유죄 증거로 못 쓴다"

중앙일보

입력

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 전경. 뉴스1

성범죄 사건 피해자가 재판 중 제출한 탄원서를 피고인에 대한 유죄의 증거로 쓰면 안 된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지난달 12일 “피해자의 탄원서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광주고등법원이 지난해 강간상해죄 피고인에 대해 1심 징역 2년 6개월의 집행유예 3년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판결문에 피해자의 탄원서를 근거로 든 대목을 두고 나왔다. 피해자와 피고인은 범행 여부를 놓고 1심부터 다퉜는데 항소심 재판부가 ‘피해자 말은 믿을 만하다’며 여러 근거 중 하나로 탄원서에 적힌 얘기를 한 문장 정도 넣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피해자는 경찰 단계서부터 ‘전 남자친구인 피고인이 강제로 성관계하려고 시도했으나 강하게 반항해 실패했는데 그 과정에서 얼굴과 귀를 맞아 상해를 입었다’고 해 왔다. 반면 피고인은 ‘얼굴과 귀를 때려 상해를 입힌 건 맞지만, 말다툼 중 벌어진 일이고 간음행위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당초 상해죄로만 기소했다.

이후 1심부터 강간상해죄를 인정해 1심 징역 2년 6개월의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강간상해는 ‘강간의 기회’에 피해자에게 상해를 입힘으로써 성립하고 강간이 미수에 그쳤더라도 형량에만 고려할 뿐 강간상해죄라는 죄명은 동일하다. 피고인은 이에 불복해 항소하면서 ‘상해는 맞으나 강간상해는 아니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피고인은 구체적으로 ‘피해자가 112 신고 당시나 119 구급대원에게 폭행 얘기만 하고 강간 얘기는 안 하지 않았느냐’ ‘피해자는 연인관계를 유지하려 했는데 강제로 할 이유가 있겠냐’ 등을 가지고 다퉜다. 이는 항소심 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광주고법 제주 형사1부(부장 이재신)는 “당심에 이르기까지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서 피해자를 탓하고 있다”며 형량을 올렸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당시 폭행으로 청력을 일부 잃었고 치아도 손상돼 치료가 급한 상황에서 미수에 그친 강간 얘기는 의료진에게 필요한 정보도 아니었고, 말할 필요도 없었으며,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돌아갈 마음이 있었는지 의문이고 그렇다 해도 성관계 동의는 또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한때 연인이던 두 사람 사이 엇갈린 내밀한 이야기가 더 있었는데 피해자 얘기가 납득이 간다며 탄원서 내용의 한 문장을 판결문에 인용했다.

이에 대법원은 “피해자를 범죄사실의 인정에 해당하지 않는 사항에 관해 의견을 진술하거나 의견 진술에 갈음하는 서면을 제출하게 할 수 있는데 의견 진술과 서면은 범죄사실의 인정을 위한 증거로 할 수 없다”는 형사소송규칙을 짚은 뒤 “탄원서는 의견 진술에 갈음해 제출한 서면임에도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범죄사실의 증명과 관련해선 피고인의 반대신문이 보장되는 증인신문을 통해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다만 대법원은 사건의 결론까지 뒤집진 않았다. 대법원은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나머지 적법하게 채택된 증거들에 의하더라도 이 사건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기에 충분하다”며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해 강간상해로 실형 2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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