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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선

다시 뛸 준비된 일본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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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경제에디터

김동호 경제에디터

일본 경제가 다시 뛸 준비를 마쳤다. 오랫동안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던 마이너스 금리에서 탈출하면서다. 마이너스 금리는 실패한 정책이다. 돈을 무제한 풀어서 투자와 소비를 자극하면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일본을 ‘잃어버린 30년’의 늪에 밀어 넣었다.

일본은행은 지난달 19일 마이너스 금리 종료를 공식 선언했다. 2016년 도입 이후 8년 만이다. 마이너스 금리는 일본 경제를 왜곡하며 부작용만 남겼다. 이자 소득을 얻을 수 없고 가계부채를 부풀리며 좀비기업의 연명을 도왔다. 생산력 향상 없이 돈만 풀어서는 경제를 일으킬 수 없다는 거대한 실험이 막을 내린 셈이다. 이 실험은 고인이 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도입한 아베노믹스의 핵심 수단이었다.

아베 전 총리의 ‘성장정책’ 탄력
증시 활력 띠고 여성 취업 증가
일본에서 배울 건 배워야 할 때

2013년 시작된 아베노믹스는 세 개의 화살(재정확대, 금융완화, 성장정책)을 쐈다. 이 중에서 재정확대·금융완화는 실패라고 봐도 이상할 게 없다. 마이너스 금리의 가장 큰 부작용은 축소지향의 심리다. 일본 기업들은 잃어버린 30년간 임금을 거의 올리지 않았다. 그 결과 2022년부터 한국의 임금이 일본을 추월했다. 벌써 십수 년 전부터 일본의 역대 총리들은 기업인들만 만나면 임금을 올려주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어느 기업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선 정치권이 기업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거나 기업을 끝없이 규제하는 풍토가 강하지 않다. 그렇지만 임금만은 올려달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기업들은 저성장 체제여서 임금을 올릴 수 없었다.

‘세 번째 화살’ 성장정책은 좀 다르다. 최근 일본 경제가 바닥에서 탈출하는 힘을 제공한 것이 바로 성장정책이다. 거품경제 붕괴 직후 7000선까지 추락했던 닛케이지수가 최근 4만1000선을 밟은 원동력은 성장정책의 과실이다. 급격한 엔저(低) 여파도 있지만, 실적이 나쁘면 외국인 자금이 올 이유가 없다. 실제로 일본 기업들의 올해 1분기 이익은 전년 대비 13% 증가했고 전망도 긍정적이다. 기업이 구인난에 시달리는 만큼 고용 상황이 개선된 것도 성장정책의 여파다.

3년 전부터 본격화한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이 대표적이다. 우선 도쿄증권거래소 운영체제를 확 바꿨다. 성장주와 가치주, 스타트업을 구별하고 엄격한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증시에서 생존할 수 없도록 했다. 지난해 4월부터는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기업은 증시에 발을 못 붙이도록 압박했다. 자사주를 사들이거나 배당을 늘리고, 사외이사를 늘리든지 기업 주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도록 했다. 일본증시는 거품경제 당시 최고점을 넘어섰고 토요타자동차는 시가총액 50조엔을 돌파했다. 기술 자만심도 버렸다. 미국과 대만 기술을 받아들여 일본 곳곳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에도 적극 대처했다. 외국인력 유치를 확대하고, 무엇보다 육아 환경 개선으로 여성 취업률을 크게 높였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의 연구를 인용해 일본의 여성 인력 활용이 노동력 고민에 빠진 선진국에 중대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베노믹스에서 여성 인력 활용계획을 밝혔을 때 기껏해야 80만 명 증가를 예상했으나, 아베노믹스 이후 여성 근로자 증가 규모가 300만 명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골드만삭스는 단시간 근로자가 많은 여성의 노동시간이 더 늘어나면 일본 국내총생산(GDP)이 최대 15%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운도 좋았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덕분에 일본에서도 물가 몸살을 앓고 있다. 내친김에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 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최근 일본 기업들은 앞다퉈 임금을 올리고 나섰다. 땅값도 오르고 있다. 올해 전국 평균 공시지가는 전년 대비 2.3% 뛰면서 3년 연속 상승했다. 상승률 2%대는 1991년 버블 붕괴 이후 33년 만에 가장 높다.

결국 아베노믹스는 세 개의 화살 중 두 개의 화살은 과녁에서 빗나갔지만, 성장정책이란 ‘구조개혁’ 화살이 과녁을 맞혔다고 볼 수 있다. 아베 총리 재임 당시 일본은 성장률이 가시적으로 높아지지는 않았다. 지난해에는 독일에 경제 규모도 역전됐다.

하지만 기력을 차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런 일본 경제는 한국에 반면교사가 되기에 충분하다. 한국이 일본에선 더 배울 게 없다고 한 건 한참 된 것 같다. 적어도 한·일 공동월드컵 무렵부터다.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한국 반도체가 세계를 주름잡을 때였다. 이제는 다시 겸손해져야 한다. 일본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마이너스 금리에서 탈출하고 노동력 부족에 대응하며 밸류업에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 잘 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