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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어디에든 존재한다…그 통념에 날린 ‘카운터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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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본 나가노현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이 지역에서 촬영까지 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본 나가노현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이 지역에서 촬영까지 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우거진 숲에서 장작을 얻고, 깨끗한 개울물을 마시며 살아간다. 이런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일본 산골마을에 글램핑 야영장 건설이 계획된다. 오염을 우려한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기획사 직원들은 마을 사정을 꿰뚫고 있는 토박이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를 회유하려 한다. 그러나 타쿠미의 딸 하나(니시카와 료·사진)가 갑자기 사라지고 예기치 못한 사건까지 벌어진다. 유일한 단서는 타쿠미의 이런 경고다.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

지난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수수께끼 같은 결말로 주목받은 일본의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45)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개봉(3월 27일) 첫 주말 독립·예술영화 흥행 1위(31일까지 누적관객 1만9308명)에 올랐다.

2021년 한 해에 영화 ‘우연과 상상’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 국제영화제 각본상, 이듬해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잇따라 차지한 하마구치 감독의 작품 세계가 넓어졌다는 평가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까지 석권하며, 일본 영화계 전설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를 잇는 4대 영화제 그랜드슬램 수상 기록을 세웠다.

영화는 ‘시골 젠트리피케이션’(미국 매체 ‘버라이어티’), ‘친환경 드라마’(‘콜라이더’)로 수식된다. 초기작 ‘해피아워’(2015)가 318분에 달할 만큼 긴 러닝타임과 풍성한 대사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하마구치 감독은 이번 영화에선 과묵해졌다. 러닝타임도 106분으로 확 줄었다. 도드라지는 건 자연의 떨림과 움직임을 선율에 담은 음악과 사운드다.

3년 전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함께한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이 자신의 라이브 콘서트용 영상을 하마구치 감독에게 의뢰한 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출발점이 됐다. 뮤직비디오 연출 경험이 없는 하마구치 감독은 이시바시 음악감독이 음악 작업을 해온 나가노현 주변 시골의 자연과 현지 주민들을 취재하던 중 영화 속 글램핑장 설명회와 비슷한 상황을 목격했단다.

주연은 전작처럼 연기가 처음인 비전문 배우가 맡았다. ‘우연과 상상’ 스태프이자 이번 영화 준비 과정을 함께한 오미카 히토시의 “살쾡이 같은 얼굴과 느낌이 좋아서” 배역을 제안했다.

지난해 9월 베니스영화제에서 주연 배우 오미카 히토시(오른쪽)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심사위원대상을 번쩍 들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9월 베니스영화제에서 주연 배우 오미카 히토시(오른쪽)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심사위원대상을 번쩍 들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부산 국제영화제를 찾은 하마구치 감독은 “장기적인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일들이 최근 10년 동안 일본에서 많이 벌어졌다”면서 “장기적으로 어떤 일을 초래할지 예상하지 않고 단기적 이익을 좇는 전형적인 패턴이 문제”라고 밝혔다.

앞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선 “인간이 자연에 들어갈 때마다 자연을 파괴하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조율해 갈 지에 대한 대화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관점을 절제한 대사에 담았다.

가령 타쿠미가 “글램핑장 예정지가 사슴이 다니는 길”이라고 알려주는 대목이다. “사슴들은 어디로 갈까?” 그가 묻자, 도시에서 온 기획사 직원들은 “어디론가 딴 데로 가겠죠”라고 무관심하게 답한다. 영화 초반부터 들려오는 사슴 사냥꾼의 총성도 불안감을 조성한다.

“인간 관계, 마음의 여정을 마치 ‘그래비티’처럼 체험하게 해주는”(봉준호 감독) 하마구치 영화의 특성은 글램핑장 설명회 장면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건설사 측과의 적막한 긴장감, 주민들의 긴 발언,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부조리한 상황 등을 편집된 화면이 아니라 관객이 실제 설명회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살려냈다.

영화 속엔 평화로운 숲 장면에서 음악이 거칠게 끊기는 장면도 많다.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자연이 가혹한 최후를 맞을 수 있다는 경고로 읽힌다.

자본의 논리가 보이지 않는 손처럼 개인의 운명을 말살할 수 있다는 주제의식은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이 연상된다”(미국 매체 ‘인디와이어’)는 평가를 받는다.

자본은 웃는 얼굴로 다가오고, 삶을 침해 당한 자들의 반격은 절박하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사회에서 악이란 과연 무엇일까.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갖고 따질 수 있을까. 제목의 의도다.

하마구치 감독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을 보면 관객들이 영화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게 될 거라 생각한다”면서 “자연에는 선과 악, 정의란 게 없다. 악은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통념에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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