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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맵만 만들어선 경제개혁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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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선 정책의 오너십이 중요하다. 위원회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정부부처는 시행만 하라고 해선 공무원이 신명을 내며 책임감 있게 일하기 힘들다."

1998년 외환위기 극복을 주도했던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현 코람코 자산신탁 회장.사진)은 난마처럼 얽힌 현 경제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이같이 지적했다. 최근 '한국의 외환위기-발생.극복.그 이후'란 책을 펴낸 이 전 장관은 30일 "로드맵만 만든다고 될 일이 아니다"라며 "해당 부처에 정책 입안권과 시행권을 함께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때는 연말이면 도로.철도.공장 건설 등의 진척 사항을 체크하는 것이 일이었고 그게 장관의 실적평가였다"며 "정책이 제대로 실행되는지를 챙기는 게 중요하고 청와대는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가장 걱정되는 것은 환율"이라고 말했다. "금리 등 경제 변수들이 올바른 값어치에서 괴리되지 않도록 경제가 운영돼야 하고, 한국 경제는 특히 대외의존도가 매우 크므로 환율의 적정 수준 유지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요즘 환율이 너무 가파르게 떨어지고(원화 가치 상승) 있는데 이에 대처할 수단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는 "경상수지가 흑자인데 자본수지까지 흑자가 나면 어떡하느냐"며 환율 대책으로 '사고의 전환과 크고 넓은 안목'을 주문했다. "진작부터 금융회사들이 넘치는 달러를 들고 해외로 나가 장사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단기적으론 외평채 발행밖에 없다"고 말했다.

부동산 광풍(狂風)에 대해선 "돈이 너무 많이 풀렸다"며 "돈이 투자 쪽으로 갈 수 있도록 흐름을 터줘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수도권 아파트가 부동산값 급등의 진원지가 되는 것은 교육과 일자리 때문에 수도권으로 몰려드는 '사회적 이주'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런데도 현 정부엔 지방에 대규모로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정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옮기는 정도로는 안 된다"며 "땅을 구하는 재벌에게 지방에 100만 평 정도를 왜 구해주지 못하나"라고도 했다. 한편으론 수도권에 서민 주택을 많이 공급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경제 전문가이면서도 인터뷰 내내 대대적인 교육 시스템 혁신을 강조했다. 치열해진 국제경쟁 속에선 '교육 없인 경제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학생들이 외국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도록 국민 수요에 맞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0년 전 외환위기 원인을 "개혁 프로그램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도 위기의 기아차만 해도 대책을 만들어 놓고도 시민단체와 노동조합 등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립과 투쟁의 '사회관리체제'가 문제였다. 그걸 경쟁과 협력체제로 바꿔나가야 한다"며 "아직도 노동시장을 비롯해 일부 분야엔 대립과 투쟁이 만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위기가 오면 국민이 얼마나 참담한 고통을 겪는지를 외환위기 과정에서 실감했다는 이 전 장관은 정쟁과 대립으로 시간을 보내는 정치권에 이런 충고를 했다. "비록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에서 시작됐지만 경제 변수들을 제자리에 있지 못하도록 하는 정치는 결국 국민을 궁지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결국 경제 안정이라는 얘기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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