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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말라" 판사 말에 울음 터졌다…180억 전세사기 재판서 생긴 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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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서 180억원대 전세 사기를 벌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50대가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판사는 이날 법정에서 피해자들이 써낸 탄원서를 하나씩 읽으며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 1단독 박주영 판사는 사기 혐의로 기소된 50대 A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고 23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020년부터 3년간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부산 수영구 오피스텔을 비롯해 9개 건물에서 임대사업을 하면서 229명에게 전세보증금 180억원을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박 판사는 검찰이 구형한 징역 13년보다 더 높은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박 판사는 전세 사기 범행이 주택시장의 건전한 거래 질서를 교란하고 서민들의 생활 기반을 뿌리치는 중대 범죄라고 짚으면서 "피고인은 피해 복구를 위한 실질적인 조처를 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이 사건 범행으로 인한 재산상 손해와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며 엄벌을 거듭 탄원하고 있어 중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박 판사는 '부동산 정책 변화와 금리 인상 등으로 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했다'는 A씨의 주장에는 "부동산 경기나 이자율 등 경제 사정은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고 변동할 수 있어 임대인은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고 대비해야 한다"며 "이 사건의 주된 책임은 자기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임대사업을 벌인 피고인에게 있다"고 질책했다.

박 판사는 이날 20~30대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제출한 탄원서를 하나하나 읽기도 했다. 이어 선고가 끝난 뒤에는 "잠시 드릴 말씀이 있다"며 미리 써온 '당부의 말씀'을 읽었다.

박 판사는 "험난한 세상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기성세대로서 비통한 심정으로 여러분의 사연을 읽고 또 읽었다"며 "여러분은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말라.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지 여러분이 결코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박 판사가 말을 마치자 재판을 지켜본 피해자들 중 일부는 울음을 터뜨렸다.

김현수 전세 사기 피해자 대책위원회 공동 부위원장은 "검찰의 구형보다 많은 형을 선고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동종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형이 계속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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