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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과학기술에는 국경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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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우일 서울대 명예교수·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이우일 서울대 명예교수·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1970년대 중반에 막대한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한 중동 건설 붐을 기억할 것이다. 건설 근로자는 외화 획득의 첨병으로 경제 성장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KBS ‘가요무대’ 진행자 김동건씨는 요즘도 방송을 시작하며 “멀리 계시는 해외동포, 그리고 해외근로자 여러분, 지난 한 주 안녕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을 변함없이 전한다.

화석연료 시대가 저물 것으로 예상되면서 최근 중동 국가들은 경제 체질을 바꾸기 위한 노력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동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는 ‘포스트 오일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사우디 비전 2030’을 발표하고, 산업구조 다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사우디 국빈 방문을 통해 수소 경제, 스마트 시티, 미래형 교통수단 등 미래 지향적 산업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사실은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로서 의미가 커 보였다.

산업구조 다변화 나선 사우디
과학계도 글로벌 연대 움직임
선도·도전적 연구환경 조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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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국빈 방문 중에 ‘한·사우디 미래기술 파트너십 포럼’이 열렸다. 양국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첨단디지털, 청정에너지, 첨단바이오, 우주 등 미래기술에 대한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이 포럼에 참석하면서 사우디 전문가들이 한국의 과학기술계와 협력하려는 진지한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디지털 분야에서 네옴시티 프로젝트 같은 디지털 전환 사업에 인공지능(AI), 디지털 트윈, 클라우드 등 한국의 강점 기술을 접목하려고 한국 기업들에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이제 한·사우디 양국은 전통적인 에너지·자원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미래산업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핵심 동반자로 거듭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글로벌 과학기술 연대 시대에 한국 국내 상황은 어떠한가.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중 국제공동연구 비중은 1.9%로 이탈리아(7.1%), 영국(5.3%), 독일(3.4%)보다 매우 낮다. 또한 국제공저 논문 비율은 16.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7.1%)보다 저조한 실정이다. 이는 글로벌 시대에 우리는 아직도 한국 중심의 나 홀로 연구에 머물고 있다는 방증이다. 글로벌 과학계와 연대해 함께 성장하는 과학기술 프레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는 비효율을 걷어내기 위해 내년도 R&D 예산을 일부 구조조정했지만, 글로벌 과학기술 협력을 위한 R&D 예산은 1조8000억원으로 크게 늘렸다. 과학기술 국제 연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두텁게 지원하기 위한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산 증액에 그치지 말고, 연구 성과의 배분 문제와 같은 공동연구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등 글로벌 R&D 협력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세계적 수준의 연구역량을 보유한 연구팀과의 협력은 오랜 기간 신뢰를 쌓아야 가능하기 때문에 정부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국제협력 R&D 예산 지원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사우디 격언에 ‘사막을 건너려거든 좋은 친구를 선택하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제는 우리 과학자들도 ‘우물 안 개구리’에서 탈피해 시야를 넓혀 글로벌 과학자들과 연대함으로써 미래 세대를 함께 키우고 인류의 복지와 삶의 질을 제고하는 데 함께 기여해야 한다.

정부 R&D 예산의 구조조정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뜨겁다. 정부는 그동안 R&D 예산이 급격하게 증가한 데 비해 충분한 과제 기획과 연구 설계 준비는 부족해 나눠주기식 과제가 확대됐다는 입장이다. 기초연구와 같이 인력 양성 과정에서 지원하는 소액 과제는 빼고서라도 국책 연구는 R&D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도전성과 혁신성을 진작할 수 있도록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이번에야말로 정부 R&D의 우선순위를 시대 상황에 맞게 재설정하고 R&D 지원 시스템을 본질적으로 보완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한-사우디 미래기술 파트너십 포럼에서 윤 대통령은 “국가의 역량은 과학기술 수준에 달려 있고 국가는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교육과 대학의 연구 역량 제고, 그리고 미래 첨단산업 기술에 대한 선행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제는 우리 과학계도 정부의 과학기술 육성 의지를 믿고 선도적이고 도전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는 데 지혜를 함께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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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일 서울대 명예교수·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