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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대사'와 '대사 시인' … 고은 시인 - 바리외 스웨덴 대사, 문학을 논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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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바투 마주앉은 한국의 고은 시인과 라르스 바리외 주한 스웨덴 대사. 허심탄회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문학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가 오고갔다. 좌담은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 스웨덴 대사관에서 열렸다. [사진=박종근 기자]

한 나라의 시인과 그 나라에 파견 된 외교관의 만남은 뜻밖에 편안했다. 이미 한두 번 만났던 사이인데다 둘이 공유하는 게 있었던 덕분일것이다. 고은 시인과 라르스 바리외주한 스웨덴 대사가 한 시간 반 동안 나눈 대화는 오로지 문학에 관한것이었다. 대사가 바라보는 동아시아 문화와 한국문학, 이에 대한 시인의 답변이 이어졌다. 둘의 만남은 지난달 말 고은 시인이 스웨덴의 시카다 상 수상자로 결정되면서 자연스레 성사됐다. 시상식은 오늘(28
일) 오후 6시 서울 성북동 스웨덴대사관저에서 열린다.

▶고은 시인(이하 시인)=지금 한국은 가을이 막 떠나려는 참이다. 가을은 동서양이 없다고 들었다. 니체는 가을이 좋아 가을로 생일을 바꾸기도 했다. 그만큼 가을은 좋은 것이다. 대사께선 한국에서 보내는 첫 가을이 어떠신가.

▶라르스 바리외 대사(이하 대사)=지금 서울의 날씨가 스웨덴의 10월 초 날씨와 비슷하다. 나는 10월 초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때 고은 시인을 만나게 돼 기쁘다. 시인의 작품을 여러 번 읽었다(올 1월 주한대사로 임명된 라르스 바리외 대사는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문학에 조예가 깊다. 1993~98년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일본문학에 대한 안목을 키워 하이쿠(俳句)나 단편소설을 스웨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지금은 주한 대사들 사이에서 한국문학을 읽는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시인=지금까지 시집 세 권이 스웨덴에 소개됐다. 내년엔 소설이 한 권 소개될 예정이다('선시집'(2002년) '만인보와 그외 시들'(2005년) '순간의 꽃'(2006년) 을 말한다. 번역 중인 소설은 '화엄경'이다).

▶대사=문학작품이 외국에 제대로 알려지기 위해선 번역이 중요한데, 스웨덴에 소개된 고은 시인의 작품은 번역도 좋았다. 훌륭한 번역자들이다.

▶시인=현지에 친구가 있다.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뫼르다.

▶대사=스웨덴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이다. 두 분이 친하다는 걸 알고 있다.

▶시인=한번은 스톡홀롬에 갔을 때 토마스의 집에 초대됐는데, 오른손이 불편한 그 친구가 왼손으로 나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때 둘이서 와인을 실컷 마셨다.

▶대사=동양시와 와인은 왠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시인=대사께서 시를 쓴다는 얘기는 진작부터 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사 중엔 시인도 적지 않았다. 1920년대 주일 프랑스 대사였던 까미유 끌로델의 동생 폴 끌로델도 유명한 시인이었다.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도 인도 대사를 오래 맡았다. 사실 나도 어렸을 때,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가 되고 싶었다. 지금은 시의 대사가 되어서 세계 곳곳을 떠돌며 살지만 ….

▶대사=굉장히 좋은 대사가 됐을 것 같다. 여기 엽서에 적힌 게 내 시다. 일본의 하이쿠를 스웨덴어로 표현했다.

▶시인=아시아 고유의 시 형식이 널리 알려지는 건 행복한 일이다. 한국에도 고유의 시, 시조가 있다. 나도 여태 자유시만 쓰다가 올해 처음 시조를 썼다(본지 6월 27일자 21면 보도). 앞으로 시조집도 낼 생각이다. 대사께서도 한국에 머무는 동안 시조를 알게 되면 좋겠다. 좋은 시조시인을 소개해 줄 수 있다.

▶대사=정말 꼭 배우고 싶다.

▶시인=시조는 원래 노래였다. 예전엔 노래로 불렀다(시인은 급기야 시조창 한 자락을 읊기 시작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대사=한국의 판소리가 생각난다.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소리는 무척 흥미로웠다. 한국인의 정서가 생생히 와닿는 것 같았다.

▶시인=60년대 미국작가 펄벅이 방한했을 때 일이다. 그때 그녀가 이런 얘기를 했었다. 기차를 타고 경주를 갔다오는데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한국에 시인이 많은 이유를 알게 됐다고. 한국의 전통사회에선 시를 잘 지어야 벼슬을 할 수 있었다. 예전엔 왕도 시인이었다.

▶대사=시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문열의 소설 '시인'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시인=귀한 만남이었으니 재미난 얘기를 하나 해주겠다. 저기 벽에 스웨덴 왕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저 왕의 할아버지가 왕자였을 때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왕자는 경주에 내려가서 왕릉을 발굴하는데 참여했고 그때 발굴된 왕릉이 서봉총(瑞鳳塚)이다. 서봉총의 '서'가 스웨덴에서 따온 말이다. '봉'은 왕을 상징하는 것이고.

▶대사=스웨덴과 한국의 인연이 깊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됐다. 진실로 유익한 만남이었다.

둘이 마주앉기 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와인은 좌담이 끝날 무렵이 되자 모두 비워졌다.대사는 영어를 사용했다. IHT의 박수미 기자가 통역을 맡았다.

정리=손민호 기자<ploveso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시카다(Cikada) 상=스웨덴의 노벨 문학상 수상시인 해리 마틴스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04년 제정됐다. '시카다'는 해리 마틴슨이 53년 출간한 시인의 시선집 제목에서 따왔다. '시카다'는 매미란 뜻. 일본에서 원폭 이후 소생한 첫 생명을 상징한다. 고은 시인 이전엔 일본시인에게만 상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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