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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은미의 마음 읽기

외로움을 말해보는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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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은미 소설가

최은미 소설가

8월 말에 신간이 나온 뒤 여러 외부 일정을 거치며 지난 한 달을 보냈다. 장편소설을 쓰는 동안엔 몇 달씩 먼 외출을 접고 최소한의 동선으로만 움직이는 날이 많다. 그러다 보니 내겐 출간 뒤의 시간이 안 쓰던 근육을 한꺼번에 몰아 쓰는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팬데믹 때 깊어진 단절과 고독
우리 모두는 외로움으로 연결
영국은 사회적 질병으로 분류
독자들과 얘기하며 새 힘 찾아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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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온 뒤의 한 달은 매우 기이한 시간대다. 출판사에서 온 저자 증정본 박스를 열고 책 실물을 받아들고 나면 그때부터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 같은 각성 상태가 시작된다. 후련함과 허전함, 흥분과 체념, 간질간질한 활기와 허공 같은 우울이 교차한다. 그 상태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길은 다른 소설을 쓰는 것뿐이지만 그 한 달간은 이상하게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그 기간은 아직 그 세계를 빠져나가지 말라고 책이 내게 걸어놓은 주술의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출간 뒤에 받는 여러 질문이나 대화나 리뷰를 통해서, 그러니까 독자의 존재를 경유하고 난 뒤에야 내가 쓴 것의 의미를 마지막 퍼즐을 찾듯 알게 될 때가 있다. 원고를 쓰고 책으로 내면서도 미처 다 알지 못했던 것이 외부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누운 머리 위에서 서서히 살아나 비로소 책의 의미를 완성하는 순간들. 출간 뒤의 한 달은 그런 일이 일어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난주에 두 차례 독자들과 만나는 북 토크 행사가 있었다. 나는 아마도 실물 독자에 좀 굶주려 있었던 것 같다. 팬데믹 기간에도 책이 나오긴 했지만 그땐 독자들을 가까이에서 만나지 못했다. 이번엔 책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독자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평일 저녁과 주말의 귀한 시간을 빼서 특정 공간으로 작가를 만나러 오는 이들의 얼굴을 눈앞에서 보고 싶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었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소설에서 거의 했으니 그 기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 독자들의 얘기를 더 듣고도 싶었다.

작은 공간에서 하는 소규모 행사는 누군가 소리 없이 웃어도 왠지 그 웃음을 알아챌 수 있어서 좋다. 단이 나뉘어 있지 않아 더 수월히 눈이 마주치고 마이크가 없어도 서로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소설의 어떤 부분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하면 그게 어떤 마음이었는지 눈빛과 표정으로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게 된다.

책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독자분이 팬데믹 시기에 느낀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외로웠고 그 외로움이 힘겨웠는데, 소설을 읽는 동안 그 외로움이 자신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런 의미의 얘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독자분이 느껴온 외로움이 개인적 감정으로서의 외로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나 또한 외로워서, 이 외로움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 알고 싶어서 ‘나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문장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외롭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무섭습니다’나 ‘나는 화가 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그 말은 왠지 모를 구차함을 동반하고 다른 맥락으로 쉽게 오독되며 나의 못남을 끝내 인정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지난 3년간, 아니 그 이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이 어떤 순간에 결정적으로 고립감을 느끼는지를 떠올리다 보면, 내가 쓴 외로움을 읽고 자신의 외로움을 전해주는 이들을 만나다 보면 어떤 외로움은 사회적 차원에서 사유돼야 할 감정임을 생각하게 된다.

독자분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며칠 전 한 팟캐스트 녹음 중에 선물 받은 단어가 떠올랐다. 진행자인 H소설가가 만들어 전해준 ‘병연(病緣)’이라는 말이었다. 소설 속에서 균과 병을 서로서로 주고받는 인물들을 보면서 그는 이런 작은 선언을 듣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질병으로 동질하다. 우리는 혈연이 아니라 병연이다.’

2018년부터 외로움 담당 부처를 지정하고 외로움 담당 장관을 임명하며 외로움을 사회적 질병으로 접근한 영국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외로움이라는 병을 함께 겪고 있는 이들을 기꺼이 병연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병이 아니어도 좋다. 외로워서, 외롭다고, 외로움에 대해 말하다 보면 단절과 고립의 대명사인 듯인 이 외로움을 두고 언젠간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외로움으로 연결된다.’

마지막 북 토크 일정을 끝으로 책이 걸어놓은 한 달간의 주술 기간이 끝났다. 이제 나는 드디어 그 세계에서 빠져나와 다른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오늘 쓴 문장이 몇 년 후의 어느 작은 책방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불러내는 상상을 해본다. 그 구체적인 얼굴을 그려보는 일은 소설 쓰기라는 지난한 작업을 꽤 두근거리며 건널 수 있게 해준다. 또 만날 수 있겠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최은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