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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마음 허지원의 마음상담소

잠시 읽지 않아도 되는 마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저는 여러 불안과 노파심으로 외부 강의에 쉽게 응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내 이야기를 오해하면 어떡하지, 지루해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강의에 일단 돌입하면 마음의 모드는 바뀝니다. 청중이 하품을 하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려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사건으로만 바라볼 뿐입니다.  지금 내가 몰입해 있는 나의 시간과 나의 세계는 무엇도 침범할 수 없고 공격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을 다해 노력할 때, 굳이 읽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먼저 나를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나를 뒤흔들고 찔러보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타인의 마음까지 굳이 읽어가면서 반응해주려 애쓰시는 경우를 봅니다. 누군가 화가 났거나 언짢아하는 것을 눈치채고 괴로워합니다.

타인의 악의에 휘둘리지 말고
우울·불안의 원인 따지지 말길
내가 가야 할 길은 그대로 가야

[일러스트=박용석]

[일러스트=박용석]

저희 연구실에서 한국판으로 개발했던 ‘눈에서 마음읽기’ 검사가 있습니다. 눈 부위만 찍힌 사진을 보고 그 사람의 정서적 상태를 가늠하는 검사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평균점수는 엇비슷하여 10번 중에 한 번은 틀립니다. 물론 그보다 덜 맞혀도 됩니다. 제가 걱정하는 분들은, 열이면 열 모두를 맞히는 분들입니다. 나를 공격하려 하거나 나를 통제하려는 타인의 마음은, 굳이 살피지 않아도 됩니다. 타인의 마음을 낱낱이 읽기 시작하면 나의 세상은 그 경계선을 잃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읽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 중 하나는 각이랑이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영역은 조금 독특합니다. 자신과 타인의 관점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경계를 구별 지으며 자신을 억제하는 고차원적인 기능을 합니다. 다시 말해, 타인의 감정을 살필 때 그 사람의 기분은 그 사람의 것, 나의 기분은 나의 것으로 구분 짓는 일입니다.

작년 저희 연구실에서 자해행동을 반복하는 청년을 대상으로 ‘눈에서 마음읽기’ 검사를 사용한 뇌영상연구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독특한 점은, 자해군은 타인의 감정을 읽을 때 유독 각이랑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화면에 제시된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조차도 자기 세계의 경계는 흐려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욕망과 기분에 맞추려 자신의 세계를 붕괴해 타인을 들일 가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럴 가치는,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예의와 최선을 갖추어 타인을 대했다면, 그때부터는 타인의 악의적인 마음과 언짢은 기분은 타인의 것입니다.

무심한 청중 앞에서 발표한다고 해볼까요. 5분만 지나도 몇몇은 집중력을 잃고 하품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강연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일단은 냅다 갈 일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허둥댈 일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내가 마쳐야 하는 과업, 내가 감내하고 지나야 할 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동안 참 많이 준비해왔고 비로소 나의 생에 몰입하려던 참이었다면, 타인의 말과 눈짓과 의도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추구하며 온 마음을 다할 때 ‘잠시’ 읽지 않아도 되는 마음 중 하나는 나의 마음입니다. 아니, 그렇게 마음읽기를 하라더니! 내 감정을 세분화하여 인식하라더니! 하는 분이 있으실 텐데 그 역시 맞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이미 우울과 불안 등 부정적인 마음이 우리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이 마음을 깊게 살피는 것은 잠시 미루는 전략도 때로 함께 쓰시라는 것입니다. 내게 우울과 불안이 찾아오는 그 모든 순간마다 이들을 나의 손님으로 대접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올 건데요. 지금만 날이 아니에요.

저는 심리치료 기법 중에, “만약 지금의 고민이 밤새 기적처럼 사라졌다면, 다음날 아침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어떤 모습을 보고는 당신의 변화를 느낄까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분은 이렇게 답을 합니다. 뭔가에 집중하거나 더러 즐거워하는 모습도 보이겠죠, 아침 일찍 집을 나서겠죠, 그 일을 다시 시작해보겠지요. 그럼, 그렇게 해보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크기는 무한대로 넓힐 수 있다는 이전의 우리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요. 실제로 고민이 어딘가로 기적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태도와 행동이 달라지는 그 순간 내 마음의 구조는 다시 넓어지고 견고해집니다.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보이는 것이 바뀐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분명 문제를 보는 관점과 전략이 달라집니다.

어떤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타인의 마음을 내내 읽어가며 슬퍼하지도 말고, 나의 마음을 들쑤시느라 에너지를 흐트러뜨리지 말고, 그저 걸어야 할 길을 가세요. 저는 90대 어르신이 70대 어르신들에게 한창때다, 하셨다는 일화를 좋아합니다. 90대 어르신의 지혜로 보건대, 지금은 모두에게 여전히 한창때입니다. 멈추지 말아요.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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