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KGB가 운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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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 쇠락의 길을 걸었던 러시아 정보기관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00년 집권한 이래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들이 정.재계 요직을 속속 차지하고 있으며 그 후신인 연방보안국(FSB)의 위상은 날로 높아져 가고 있다. KGB에 관한 책을 펴낸 러시아 언론인 예프게냐 알바트는 "현재 러시아는 그 이름이 어떻게 불리든 간에 KGB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 리트비넨코 살해 배후 의혹= 러시아 정보기관은 영국에 망명한 전 KG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의 최근 독극물 피살사건을 비롯한 여러 건의 반(反)러시아 인사 암살사건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다. 반체제 인사 탄압과 권력 유지를 위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러 악명 높았던 KGB의 전성시대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이다.

방사능 물질인 폴로늄 210에 의해 독살된 리트비넨코는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다 영국에 망명한 이후 지속적으로 반러시아 활동을 벌여 러시아 정보당국의 주요 표적이 됐다.

그는 2002년에 쓴 책 '러시아 폭파하기:내부로부터의 테러'에서 "FSB가 1999년 300명 이상을 희생시킨 러시아 아파트 폭파사건을 조종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러시아 정부의 주장처럼 체첸 반군에 의한 테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또 반체제 인사인 영국 망명 거물 기업가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받은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독극물에 의해 살해되기 전 리트비넨코는 러시아 여기자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피살사건을 집중 추적했다. 폴리트코프스카야 기자는 체첸의 인권 상황을 집중 보도하다 지난달 총격을 받아 숨졌다. 그는 이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이탈리아 사람을 만난 뒤 독극물 중독 증상으로 입원했다.

리트비넨코는 사망 직전 영국 선데이 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러시아 정보기관이 나를 주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나를 감시하는 인물은 빅토르 키로프이며, 그는 영국 주재 러시아대사관의 영사 자격으로 여러 분야에서 첩보활동을 펴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폴리트코프스카야 살해사건에도 러시아 정보기관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하다. 2년 전에는 반러시아 기치를 올렸던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의 주역 빅토르 유셴코(현 대통령)를 다이옥신으로 독살하려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일련의 사건에 대한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크렘린의 지령 여부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러시아 정보기관의 개입설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러시아 정보기관의 부흥기에 이런 암살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26일 지적했다.

◆ 화려하게 부활한 정보기관=동유럽 국가에서와는 달리 소련 붕괴 이후에도 KGB는 해체되지 않았다. 주로 국내정보를 다루는 FSB와 해외정보를 담당하는 SVR로 조직이 나누어지고 이름만 달라졌을 뿐이다. 푸틴의 전임자인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 시절의 FSB는 과거의 KGB에 비해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때 정보기관 출신들은 '올리가르키(러시아의 독과점 재벌)'로 대거 자리를 옮겼다.

푸틴 대통령은 2000년 집권에 성공하면서 옛 KGB 본부 건물에서 "(KGB 출신의 권력 장악이라는) 지령 1호를 완전히 달성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KGB 대령을 거쳐 그 후신인 FSB 총책임자를 지냈던 푸틴의 등장은 KGB의 권력 복귀나 다름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러시아 정보기관이 다시 날개를 달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러시아 정.재계에서는 KGB 출신 인사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크렘린 행정 부실장 4명 중 둘이 KGB 출신이다.

이들은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회사인 로스네프와 국영 항공사 아에로플로트의 회장을 겸하고 있다. 최대 천연가스 회사인 가스프롬 부회장도 KGB 근무 경력이 있다. 이들 초대형 국영기업은 권력.정보기관.경제라는 세 요소가 결합된 공룡으로 부상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은 정보기관의 위상을 한층 더 높였다. 의회는 러시아 안보에 위협이 된다면 어떤 대상도 제거할 수 있는 특수조직을 가동할 수 있는 권한을 올해 푸틴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리트비넨코 살해사건에도 이와 관련된 조직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유럽 언론들은 보고 있다.

한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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