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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석만의 시선

‘내 사람 지상주의’의 파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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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윤석만 논설위원

윤석만 논설위원

지난주 논단에서 가장 시끄러웠던 이슈 중 하나는 소설가 김훈의 중앙일보 4일자 칼럼이었다. ‘내 새끼 지상주의’라는 제목의 글로 3만 여명이 모인 전국 교사 집회 현장을 직접 다녀와서 쓴 글이다. 제목대로 자기 아이만 생각하는 부모들의 그릇된 인식이 오늘날 공교육 붕괴의 원인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정작 논란이 된 것은 그가 예로 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입시비리 사례였다. 칼럼에선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 조 전 장관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조 전 장관은)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일갈했다.

조국 비판 김훈, 지지자 비난 쇄도
1년 전 문재인 책 추천 때와 딴판
독선적 ○빠, 민주주의 위기 불러

5000자 남짓의 칼럼에서 조 전 장관에 대한 부분은 200여 자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전 장관 지지자들은 김훈을 집중 공격했다. “책을 갖다 버리겠다”는 ‘손절’ 의사 표현부터 “권력에 빌붙는 게 습관인 인간”, “노망이 났다”와 같은 원색적 비난까지 잇따랐다.

그 중에서도 김주대 시인은 자신의 SNS에 “수구보수 언론과 무소불위 검찰의 십자포화를 맞고 쓰러진 사람을 다시 짓밟는 일은 작가가 할 일이 아니다”며 “사모펀드 건은 무죄로 판명됐다. 검찰의 기소가 얼마나 정권 야욕적이고 모순적이며 선택적인지 알고 있느냐”고 비판했다. 김민웅 전 경희대 교수는 칼럼에서 “정순신·이동관은 빠지고 조국은 들어간 ‘내 새끼 지상주의’”라며 “교사 갑질과 아무 상관도 없는 조국을 난데없이 끌어들이고 논지의 타당성이 전혀 정돈되지 못한 횡설수설”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김훈이라는 지식인의 파탄”, “부끄러운 매명(賣名)” 등의 비판을 쏟아냈다.

지지자들에게 조 전 장관은 여전히 “정치검찰의 악행으로 멸문의 고통에 몰린”(김민웅 전 교수) 순교자처럼 보이는 것 같다. 이들에겐 명백히 드러난 사실과 이성적 논리도 무용지물이다. 조 전 장관은 지난 2월 1심에서 자녀 입시비리 혐의 등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딸 조민씨도 지난 10일 입시비리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조 전 장관 지지자들만 딴 세계에 사는 듯 그에 대한 ‘추앙’이 끊이지 않는다. ‘내 새끼 지상주의’가 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정치 영역에도 있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오히려 이번 사건처럼 정치 영역에서의 ‘내 사람 지상주의’는 훨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재판부가 “공정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한 점에서 죄책이 무겁다”고 판시할 만큼 조 전 장관의 죄는 가볍지 않다. 그런데도 그의 지지자들은 “(내 사람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겪게 되는 작은 불이익이나 훼손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뒤흔들어”(김훈) 버리기 일쑤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을 위해서라면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고, 표현의 자유와 소수자 보호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들까지 무너뜨린다. 김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사람 지상주의’가 정치인을 “명품 시계나 고가 핸드백처럼 물신화”하고 있다.

‘내 사람 지상주의’가 한국 정치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거대 정당 지도부조차 특정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다수의 ‘○빠’들 눈치를 보는 ‘왝더독(Wag the dog)’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주 더불어민주당 혁신위가 내놓은 당원 투표 강화는 ‘○빠’들 입김을 더욱 크게 만들 것이다.

본디 팬덤(fandom)의 ‘팬(fan)’은 라틴어 ‘fanátĭcus’에서 유래한 말로 ‘광신자’란 뜻이다. 옳고그름 및 진위를 따지는 이성적 개념이 아니다. 우리 정치가 발전하려면 ‘내 사람 지상주의’가 판치는 맹목적 팬덤부터 걸러내야 한다. 그 대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했던, 정치인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깨어있는 시민’을 키워야 한다.

공교롭게도 김훈의 책 두 권은 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과 깊은 관련이 있다. 2004년 탄핵 정국에서 노 전 대통령은 『칼의 노래』를 읽었고, 1년 전 오늘(14일) 문 전 대통령은 광복절 추천 도서로 『하얼빈』을 꼽았다. 추천 직후 책 판매량은 14·15일 전날보다 각각 78%, 55%씩 늘었다(교보문고).

이때 증가분의 상당수는 문 전 대통령 지지자가 구매했을 것이다. 당시 SNS에선 “이니(문 전 대통령)가 소개하는 건 무조건 잘 돼야 하니 샀다”와 같은 인증이 잇따랐다. 그러나 정확히 1년 뒤 김훈은 이들에게 정반대로 큰 비난과 원성을 듣고 있다. ‘내 새끼’를 건드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