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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파트 잔혹극…그보다 끔찍한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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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나원정 기자 중앙일보 기자
나원정 문화부 기자

나원정 문화부 기자

올여름 한국영화 빅4 중 ‘콘크리트 유토피아’(9일 개봉)는 극한의 재난 속에 아파트로  나뉜 계급, 집단 이기주의의 민낯을 드러낸다. 대지진이 집어삼킨 폐허에서 오직 아파트 한 채만 살아남았다. 살려고 몰려온 외부인을 받아줄지를 두고 입주자들은 충돌한다.

원작 웹툰에 기반한 만화 같은 상상이지만, 실화를 모티브로 한 다른 경쟁작보다 되레 더 현실적이다. ‘아파트 공화국’ 한국의 실정을 은유한 듯한 대목 때문이다. 90도로 꺾어지고 고꾸라진 아파트 무덤 속에 홀로 우뚝 솟은 ‘황궁 아파트’는 배우 이병헌이 연기한 주민 영탁의 말처럼 “선택받은” 곳의 위용을 과시한다. ‘우리 가족 살기도 벅찬데…’ 라는 당장의 볼멘소리 앞에 “다 같이 살 방법을 찾자”는 소수의 목소리는 힘을 잃는다. ‘선택받은 아파트’를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유혈극이 펼쳐진다. 영화 ‘부산행’ 같은 좀비는 없이도, 사람들이 만든 지옥도가 섬뜩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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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반어법적 제목은 한국 아파트 문화를 연구한 박해천(동양대 디자인학부) 교수의 동명 학술서에 빚졌다. ‘아파트 만능주의’는 우리를 어떤 결말로 몰아갈까. 연출을 맡은 엄태화 감독은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를 참고했다고 한다. 한국의 아파트를 보고 나치·파시스트의 폭격에 쓰러져간 스페인 어느 마을 사람들의 절규를 연상하다니….

이런 ‘웃픈’ 얘기도 있다. 최근 언론시사회에서 주연 이병헌은 “세상이 다 무너졌는데 아파트 하나만 남았단 설정을 지인이 듣더니 대뜸 ‘어느 시공사냐’ 묻더라” 했다. 철근 빼먹은 ‘순살 아파트’ 탓이다. 스크린 밖 현실이 때론 영화를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