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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산사태, 우면산 때와 판박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산사태 전문가인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 교수. 천권필 기자

산사태 전문가인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 교수. 천권필 기자

“산사태가 난 7곳 중에 최소 5곳 이상이 사람이 건드린 데에서 발생했어요. 우면산 산사태와 판박이여서 현장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국내 산사태 분야의 권위자로 꼽히는 이수곤(70)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산사태 원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분노를 쏟아냈다. 지난 19일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이 전 교수는 “벌목과 임도, 태양광 등 사람이 손을 댄 개발 지역에서 규모가 큰 산사태가 집중돼 피해를 키웠다”며 “정작 정부가 지정한 산사태 위험 지역에서는 산사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올여름 역대급 장맛비로 인해 사망 47명, 실종 3명 등 많은 인명 피해가 났는데 상당수는 산사태로 매몰되면서 발생했다.

경북 산사태 발생 원인 무엇이라 보는가.
“산사태가 난 7곳 중 5곳에서 벌목이나 태양광 설치 등의 작업이 이뤄졌다. 예천군 백석리를 보면 마을이 원래 밑에만 있었는데 시간에 따라 점차 산 위로 확장됐다. 거기서부터 산사태가 발생했다. 영주시 조와동에서도 태양광을 설치하면서 물길이 바뀌었고, 태양광이 무너져 축사를 덮쳐 가축들이 죽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산사태 대부분이 그런가.
“산사태 피해 지역을 살펴보면 인간이 건드려서 발생한 사례가 80~90%다. 텃밭을 만들거나 논, 과수원 등을 조성하는 무리한 개간이 있었다.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파른 곳을 건드리면 산사태가 날 수밖에 없다.”
이 전 교수가 촬영한 경북 예천 산사태 현장. 천권필 기자

이 전 교수가 촬영한 경북 예천 산사태 현장. 천권필 기자

이 전 교수는 그의 아버지부터 아들까지, 3대가 지질학자라는 독특한 집안 내력을 갖고 있다. 그의 아버지 고(故) 이정환 씨는 국립지질광물연구소(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전신) 소장을 지낸 1세대 지질학자다. 이 전 교수의 아들 영석(35) 씨도 서울기술연구원에서 도시 지반(地盤) 등을 연구하고 있다.

산사태 권위자로 통하는 이 전 교수는 2019년 정년 퇴임과 함께 44만㎞를 달린 2003년식 쏘렌토 승용차도 폐차했지만, 이후에도 전국의 산사태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인수위원회에 재난 인명피해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한 134쪽짜리 정책 제안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의 경고는 결국 무시됐지만 이 전 교수는 “(경고해도 무시 당하는 게) 익숙하다”고 했다.

이 전 교수가 윤석열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보낸 정책제안서. 천권필 기자

이 전 교수가 윤석열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보낸 정책제안서. 천권필 기자

정책 제안서의 내용은 무엇인가.
“산사태 현장에서 36년 동안 몸담으며 목격한 모든 사례를 종합한 보고서다. 모든 참사에는 공통적인 맥락이 있다. 이를 포착해 재난관리 시스템의 허점을 지적하고 ‘대통령직속 민간 재난예방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산사태 등 재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는 산사태가 발생하면 복구부터 한다. 원인을 찾을 생각은 안 한다. 이런 관성을 끊을 방법은 국민 참여밖에 없다. 그래서 현장 종사자들과 주민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민간 주도의 국민 재난 예방 조직 구성을 제안한 것이다.”
이번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경북 산사태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제안서에서 지적한 문제가 바뀌지 않고 되풀이돼 겁났다.”

그는 “모든 재난에는 현장에서의 사전 경고음이 있다. 학자면서도 재난 발생 현장을 매일 같이 가는 이유”라며 “재난의 정치화를 멈추고 현장에서의 공익제보를 들으며 재난을 2중, 3중으로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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