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 곁에서'- 이제하(1937~ )
어쩔 수 없으면 물이나 생각하고
매여서 흔들리는 배를 보거나
내키면 기어올라 같이 흔들리거나
어슬녘엔 큰 키로 걸어가든지
벌판으론 허턱허턱 달음박질하든지
늙으면 비를 불러 묻혀서 갈 뿐
독아! 독아! 아침 저녁 물 푸시는
어머니 얼굴만 비추이던
꽝꽝 언 독아!
맹세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장독대 앞에 서 있게 되었는가. 이 소년! 맹세를 어긴 모양이다. 어머니에게 또는 사랑에게 맹세를 했다가 맹세를 어긴 죄책감에 누구나 시달리게 마련 아닌가. 하여 어쩔 수 없이 먼 곳을 생각한다. 생의 먼 뒤, 큰 키로 외롭고, 젊음의 열기로 벌판을 뛰고 또, 찬 비에 젖어 가고. 어머니의 자화상 위에 이제 제 얼굴을 비춘다. 그러나 꽝꽝 언 독 위의 자화상이라니. 가엾은 소년.
<장석남.시인>장석남.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