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부외과 전문의가 수술실을 떠나 개업하는 게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런데 응급의학 전문의가 응급실 밖으로 나와서 개업한다? 상상이 잘 안 되고 외국에 그런 예를 볼 수 없지만, 한국에선 이런 일이 생기고 있다. 의사들의 '탈(脫) 필수의료' 행렬이 응급실까지 미쳤다.
민주당 최혜영 의원이 보건복지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국 의료기관에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총 2181명이다. 종합병원(1387명)과 상급종합병원(455명)에 몰려있고, 동네의원에도 213명 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은 “개원한 의사가 최대 350~400명 정도로 추산된다”며 "근무 환경은 나빠지고 개원이라는 선택이 생기면서 현장 이탈이 심화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지난달 8일 오후 5시30쯤 찾은 경기 성남시 판교연세의원(EM365 급성기클리닉)에는 응급의사 4명이 환자를 보고 있었다. 이 병원은 첫번째 진료과목으로 '응급의학과'를 내세운다. 동네 경증 응급환자를 치료하는 게 목표다. 가톨릭대 국제성모병원 응급의학과 부교수로 있던 신형진 원장이 2016년 개업했다.
신 원장은 “밤새우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개원 생각을 하게 됐다”라며 “보통 개업하면서 응급의학과를 내세우면 성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미용 등을 내세운다. 우리는 경증 응급질환 치료가 우선이어서 응급의학과 전문의라는 점을 알린다”라고 설명했다. 열상ㆍ외상ㆍ타박상 등 응급실에서 응급환자 분류등급(KTAS) 4,5단계 해당하는 환자들이 주로 온다. 감기ㆍ두통ㆍ위염ㆍ발열 환자도 찾는다. 지난 5월 한달 간 500개 넘는 질환(상병 코드 기준)의 환자 6684명이 다녀갔다. 물론 비만, 도수 치료도 병행한다.
처음엔 간호조무사 2명, 응급구조사 2명을 두고 홀로 시작했는데 환자가 많아지며 뜻 맞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3명을 더 찾았다. 개원 후 7년간 365일 쉬지 않고 오전 9시~오후 9시 환자를 받았다. 30명의 방사선사ㆍ간호사ㆍ간호조무사ㆍ물리치료사ㆍ응급구조사 등이 2교대로 근무한다. 수도권에 비슷한 의원 6곳이 더 있고, 곧 8곳이 문을 연다.
응급전문의 개업 러시가 대형병원 응급실의 의사 인력난을 심화시킬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서울 한 대형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응급의학과 개원의가 아무리 지역에서 경증 환자를 본다해도 응급실로 몰려드는 환자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며 “비만 치료나 미용 시술로 수익 창출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개원을 선택한 동료들을 보면 훨씬 덜 일하고, 더 많이 버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나 싶을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일부에선 갈 데를 찾기 어려운 경증응급환자의 수요를 메워줄 것이라고 본다. 급성 방광염 환자 정모(35·여)씨는 “현충일에 문 연 병원을 찾다가 여기에 왔고, 오늘(지난달 8일) 또왔다. 비싸고 오래 기다리는 큰 병원 응급실보다 낫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온 초등생(8) 환자는 X선을 촬영한 뒤 단순 염좌(근육을 싸고 있는 막이나 인대에 상처가 난 것) 진료를 받았다.
이형민 회장은 “일선 병원에서 중증도가 낮은 환자를 커버해주면 그만큼 대형병원에 여력이 생긴다”라며 “전문의들이 급성기클리닉 개원을 희망한다면 의사회 차원에서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