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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중 감독 “승부차기 준비 안 했다. 한국 MZ세대의 저력을 믿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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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이하 월드컵 4강행을 이끈 김은중 20세 이하 축구대표팀 감독. 전민규 기자

20세 이하 월드컵 4강행을 이끈 김은중 20세 이하 축구대표팀 감독. 전민규 기자

“중요한 대회를 마친 많은 감독님들이 ‘만사 제쳐놓고 푹 쉬고 싶다’고 말씀하실 때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습니다. 막상 같은 입장이 되어보니 그게 가감 없는 진심이었네요.”

지난 16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본사를 방문해 인터뷰에 응한 김은중(44)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 감독의 표정은 시종일관 무덤덤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U-20월드컵에서 4강에 오르기까지 매 경기 선보인 그 표정 그대로였다. 다만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과 말투에서 큰 과제를 해결한 이의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졌다.

대회 기간 중 김 감독은 ‘포커 페이스’로 유명세를 탔다. 골을 넣거나 실점을 해도, 석연찮은 판정으로 불이익을 당해도, 심지어 거친 파울에 선수들이 고통을 호소할 때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김 감독은 “우리 선수들은 어리다. 경기 중 감독이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면 선수들도 이내 똑같은 심리 상태에 놓일 수 있다”면서 “그 점을 염려해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쓴 것”이라고 말했다.

8강에서 나이지리아를 1-0으로 꺾고 4강행을 확정 지은 직후 U-20대표팀 선수들이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8강에서 나이지리아를 1-0으로 꺾고 4강행을 확정 지은 직후 U-20대표팀 선수들이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딱 한 번, 김 감독이 울컥한 순간이 있었다. 나이지리아와의 8강전에서 승리해 4강행을 확정 지은 직후 인터뷰를 진행하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을 글썽였다. 당시 심정을 묻자 멋쩍어하던 그는 “이 선수들은 뛰어난 잠재력을 갖추고도 ‘골짜기 세대’라는 평가 속에 제대로 주목 받지 못 했다.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줄곧 그 부분이 안타까웠다”면서 “보란 듯이 이번 대회 목표(8강 이상)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면서 힘들게 준비한 기억들이 떠올라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털어놓았다.

이번 대회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개막 한 달을 남겨둔 시점에 개최지가 인도네시아에서 아르헨티나로 바뀌며 참가 팀 모두가 대혼란을 경험했다. 시차가 2시간(인도네시아)에서 12시간(아르헨티나)으로 확 늘어난 동아시아 국가들(한국과 일본)이 최대 피해자라는 분석이 나왔다.

김은중 감독은 U-20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루는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전민규 기자

김은중 감독은 U-20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루는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전민규 기자

김 감독은 “U-20월드컵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미 땅을 밟아봤다”면서 “급작스런 변화에 당황했지만 ‘그간의 준비 과정을 믿고 흔들리지 말자’고 스스로 주문을 걸며 버텼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게 낯선 아르헨티나에 입성하기 전 환경이 엇비슷한 브라질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2주간 전지훈련을 실시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이번 대회 4골을 빚은 세트피스를 비롯해 전술적 뼈대가 브라질에서 최종 완성됐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은 대회 기간 중 승부차기 연습을 단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결선 토너먼트(16강)에 오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 감독은 “브라질에 머물 때 키커와 순서를 정하기 위해 승부차기 연습을 시킨 적이 있지만, 대회 개막 이후엔 일절 하지 않았다”면서 “운이 따라야 하는 승부차기 대신 90분 또는 120분 안에 준비한 걸 모두 쏟아내 원하는 결과를 만들자는 무언의 주문이었다. 전지훈련 기간 중 우리 선수들의 킥 실력을 일찌감치 파악했기에 자신감을 갖고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선수들이 내 뜻을 이해하고 잘 따라준 덕분에 단 한 번의 승부차기도 없이 대회를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김은중 감독은 선수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수평의 리더십으로 4강행을 이끌어냈다. 뉴스1

김은중 감독은 선수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수평의 리더십으로 4강행을 이끌어냈다. 뉴스1

오랜 기간 한솥밥을 먹은 ‘MZ세대’ 제자들에 대해 김 감독은 “수동적으로 행동한 우리 세대와 달리 ‘당위성’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이 신선했다”고 설명했다. “선수 시절의 나는 지도자가 지시하면 일단 따른 뒤 나중에 판단했다. 하지만 이 선수들은 이 훈련을 왜 하는지, 실전에서 어떻게 활용할 건지 구체적인 설명을 들은 이후에야 움직였다”고 언급한 그는 “하지만 일단 납득한 이후엔 자발적으로 더 열심히 뛴다는 특징도 함께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8강에 오른 이후 어느 순간 선수단 분위기가 확 밝아진 것을 느끼며 ‘이 어려운 순간을 진심으로 즐길 줄 아는 친구들이다. 온전히 믿어주기만 하면 스스로 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제자들의 특징을 파악한 그는 ‘수평적 리더십’으로 팀을 이끌었다. 경기 당일 정장 대신 트레이닝복을 고집한 것 또한 같은 이유다. 김 감독은 “선수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대회를 치르고자 했다”면서 “축구화만 신지 않았을 뿐, 매 경기 트레이닝복 속에 선수들과 함께 부대끼며 땀을 흘린 훈련복을 챙겨 입었다. 마음으로라도 함께 뛴다는 각오였다”고 털어놓았다.

U-20월드컵 4강을 달성한 후 귀국한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선수들에게 헹가래를 받는 김은중 감독. 연합뉴스

U-20월드컵 4강을 달성한 후 귀국한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선수들에게 헹가래를 받는 김은중 감독. 연합뉴스

가장 힘들었던 경기로는 프랑스와의 조별리그 1차전을 꼽았다. 한국은 우승 후보로 손꼽힌 프랑스를 상대로 첫 경기에서 2-1 승리를 거두며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여세를 몰아 조별리그 최종전을 치르기 전 일찌감치 16강행을 확정지으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김 감독은 “이제와 말하지만, 첫 경기에 승리하지 못 하면 조별 예선의 벽을 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준비했다. ‘비기면 성공’이라며 스스로와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이었다”면서 “아시아권에서 볼 점유율을 높여 지배하는 전술을 구사하다 이번 대회엔 철저히 실리 축구로 변신한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중앙 지역을 탄탄히 지키며 수비하다가 볼을 빼앗으면 빠르고 효과적으로 역습하는 플레이 스타일이 승리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대회를 앞두고 최종 엔트리를 구성할 당시 최우선 기준은 ‘팀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선수’였다. 이른바 스타라 부를 만한 특급 해결사가 없으니 원팀으로 싸워야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었다”면서 “김태민 수석코치를 비롯해 코칭스태프들도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나보다 팀을 앞세우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고 덧붙였다.

환상의 호흡을 선보이며 U-20월드컵 4강 신화를 함께 써내려 간 김은중 감독(오른쪽)과 김태민 수석코치. 김 감독은 "4강 진출이라는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 가는 과정에 김태민 수석코치를 비롯한 여러 스태프들의 헌신이 큰 힘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전민규 기자

환상의 호흡을 선보이며 U-20월드컵 4강 신화를 함께 써내려 간 김은중 감독(오른쪽)과 김태민 수석코치. 김 감독은 "4강 진출이라는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 가는 과정에 김태민 수석코치를 비롯한 여러 스태프들의 헌신이 큰 힘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전민규 기자

‘선수 시절 김은중’과 가장 닮은 선수를 꼽아달라는 질문에 고심하던 그는 스트라이커 이영준(김천)을 언급했다. “최종 엔트리 발탁 직전 성진영(고려대), 대회 초반 박승호(인천) 등 팀 내 스트라이커 자원이 줄줄이 부상으로 낙마했다”고 설명한 김 감독은 “이영준이 사실상의 유일한 최전방 공격수로 혹사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현역 시절의 나처럼 묵묵히 버텨줬다”고 칭찬했다. 정반대 캐릭터로는 ‘테크니션’ 배준호(대전)와 ‘캡틴’ 이승원(강원)을 꼽았다. “부담감 큰 국제무대에서도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자기 플레이를 보여준 겁 없는 친구들이다. 그 당돌함이 반가웠고 또 부러웠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김 감독은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중학생 때 경기 도중 볼에 강하게 맞아 왼쪽 눈의 시력을 대부분 잃은 후 사실상 오른쪽 눈만으로 뛰면서도 축구대표팀에 발탁됐다. 이 사실이 알려지며 일본 J리그에서 뛰던 시절 ‘독안룡(獨 眼龍·한쪽 눈의 무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김은중 감독은 어린 시절 사고로 왼쪽 눈의 시력을 대부분 잃는 좌절을 경험하고도 남다른 노력 끝에 축구대표팀에 오른 입지전의 주인공이다. 전민규 기자

김은중 감독은 어린 시절 사고로 왼쪽 눈의 시력을 대부분 잃는 좌절을 경험하고도 남다른 노력 끝에 축구대표팀에 오른 입지전의 주인공이다. 전민규 기자

김 감독은 “사고 당시 곧장 찾은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들은 순간이 생생히 기억 난다”면서 “그 순간 내 마음에 좌절 대신 오기가 피어올랐다. 처음엔 거리감과 시야각이 확 달라져 빠르게 날아오는 공에 반응조차 힘들었지만, 이를 악문 훈련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선수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FIFA 주관 국제대회에서 4강에 오른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공이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다음에 남은 건 내리막길 뿐”이라면서 “지금부터가 진짜 도전이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내 축구인생 스토리가 우리 선수들에게 건전한 자극제 역할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은중 감독은 U-20월드컵 4강을 달성한 제자들에게 여기서 안주하지 말고 더 큰 목표를 향해 도전을 이어가 달라고 주문했다. 연합뉴스

김은중 감독은 U-20월드컵 4강을 달성한 제자들에게 여기서 안주하지 말고 더 큰 목표를 향해 도전을 이어가 달라고 주문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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