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블링컨 다음주 방중 앞뒀는데…"中, 쿠바에 스파이 기지" 파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다음 주 중국을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중국이 쿠바에 미군 등을 대상으로 한 스파이 기지를 운영 중”이란 보도가 불거지면서 미ㆍ중 간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백악관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내보였지만, 미 정부 당국자가 관련 내용을 시인하는 등 상황이 악화하는 분위기다.

블링컨 장관은 지난 2월 방중 직전 중국발 정찰풍선 사태가 벌어지면서 방문을 전격 취소한 적이 있어, 이번 사태가 블링컨 장관의 방중 계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중국이 미국의 앞마당인 쿠바에 적어도 2019년부터 도청 기지를 운영해온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미·중 간 새로운 갈등의 불씨로 떠오르고 있다. AP=연합뉴스

중국이 미국의 앞마당인 쿠바에 적어도 2019년부터 도청 기지를 운영해온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미·중 간 새로운 갈등의 불씨로 떠오르고 있다. AP=연합뉴스

1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익명을 요구한 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쿠바 내 중국의 스파이 기지가 미군 및 민간 빌딩의 전자신호를 탈취할 수 있으며, 해당 기지가 업그레이드된 2019년이나 그 이전부터 가동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는 미 정부가 사실상 4년 전부터 미국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쿠바에서의 중국의 도청 행위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인 셈이다.

미국은 쿠바 남동부 해안에 관타나모 해군 기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미국 마이애미까지 거리는 약 370㎞ 정도다. 1960년대 초반엔 당시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면서 '핵전쟁' 위기까지 간 적도 있다.

이 관계자는 또 “(쿠바 도청 기지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문제”라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중국이 쿠바 기지는 물론 전 세계에 유사한 시설을 건설하려는 계획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고 말했다.

쿠바에는 미 해군의 관타나모 기지 등 미군 시설이 있다. 쿠바에서 미 본토까지는 비행기로 채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AP=연합뉴스

쿠바에는 미 해군의 관타나모 기지 등 미군 시설이 있다. 쿠바에서 미 본토까지는 비행기로 채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AP=연합뉴스

이 같은 내용은 백악관의 공식 입장과는 수위가 달라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8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처음 관련 사안을 보도했을 당시,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보도가) 정확하지 않다”고 불분명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중국과 쿠바의 관계에 대해 실질적인 우려를 갖고 있고, 행정부 출범 첫날부터 (쿠바를 포함한) 우리의 반구(hemisphere)와 전 세계에서 중국의 활동에 대해 우려해왔다”고만 덧붙였다.

이런 가운데 쿠바 측은 “비방적인 추측”(카를로스 데 코시오 쿠바 외교부 차관)이라며 부인했고, 중국 측은 “미국은 해킹의 글로벌 챔피언이자 감시의 초강대국”(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라며 비꼬듯 반발했다.

그러자 당장 미 공화당에선 “바이든 행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불만이 쏟아져나왔다. 특히 미 하원의 ‘미국과 중국공산당의 전략적 경쟁에 관한 특별위원회’(중국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마이크 갤러거 의원(공화당)은 10일 성명을 통해 “왜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공산당의 쿠바 스파이 기지 보도를 부인하고, 중국공산당의 어리석은 정찰풍선을 경시했냐”고 중국발 안보 위기를 부각하며 비판했다.

"블링컨 방중에 영향 미칠지 불분명" 

이처럼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면서 블링컨 장관의 방중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 의회 등에서 쿠바 도청 기지와 관련해 문제 제기가 계속될 경우, 재선 도전을 공식화한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선 내년 2월부터 시작되는 미 대통령선거 경선 등에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전망에서다.

AP 통신 등에 따르면 블링컨 장관은 다음 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의 핵심 당국자들과 18일 회담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블링컨 장관이 카운터파트인 친강(秦剛)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외교 사령탑인 왕이(王毅)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 등을 만나 미ㆍ중 간 무력 충돌 방지를 위한 ‘가드레일(안전장치)’ 등에 대해 논의할 것으로 관측한다. 최근 남중국해 등지에서 미ㆍ중 군용기와 군함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연출하는 등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미국은 중국에 “군사 대화를 재개하자”는 입장을 거듭 밝히기도 했다.

지난해 7월 9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토니 블링컨(오른쪽) 미국 국무장관이 왕이 당시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을 만나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7월 9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토니 블링컨(오른쪽) 미국 국무장관이 왕이 당시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을 만나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최근 들어 미국의 핵심 당국자들이 미ㆍ중 관계를 “디커플링(decouplingㆍ탈동조화)이 아닌 디리스킹(deriskingㆍ위험 해소)”이라고 언급하는 등 속도 조절에 나선 것도 이 같은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 이 때문에 쿠바 도청 기지 사태가 블링컨의 방중 자체를 무산시키긴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NYT는 “미국과 매우 가까운 중국의 스파이 시설에 대한 폭로가 블링컨의 방중 계획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전했다.

한편 미국이 중국의 쿠바 도청 기지를 오랫동안 묵과해온 것과 관련해, 방첩 분야에서 활동했던 전직 한국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미 당국이 이미 시설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다면, 기만정보를 흘리는 등 역공작에 사용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며 “상대가 눈치채고 새 시설로 옮기면 관리가 더 힘들어지는 만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숨기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