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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 20년 아성 흔드는 ‘튀르키예 간디’, 대선 코앞 1위 질주

중앙일보

입력

지난 5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한 시민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왼쪽) 선거 벽보와 야권 후보 캐말 클르츠다로을루(오른쪽) 벽보를 지나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5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한 시민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왼쪽) 선거 벽보와 야권 후보 캐말 클르츠다로을루(오른쪽) 벽보를 지나치고 있다. (AP=연합뉴스

2003년 이래 20년간 튀르키예(터키)를 철권 통치해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9) 대통령이 5년 임기를 연장할 수 있을 것인가.

14일(현지시간) 치러지는 튀르키예 대선을 앞두고 에르도안 대통령이 6개 야당 연합 대표 케말 클르츠다로을루(74) 공화인민당(CHP) 후보의 강력한 도전에 주춤하고 있다. 8일 튀르키예 현지 매체 두바르에 따르면 여론조사 업체 마크가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4일 성인 575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클르츠다로을루 후보가 50.9%를 얻어 에르도안 대통령(45.4%)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3~4월 설문조사 땐 양쪽 모두 대선 1차 투표에서 승리를 선언하는데 필요한 과반수 지지율을 밑돌았지만 대선 엿새를 앞두고 클르츠다로을루가 50%를 소폭 넘은 것이다. 14일 투표에서 선두 후보가 과반을 얻지 못 하면 2주 후 결선투표에 부쳐진다. 대선과 동시에 치러지는 총선의 경우 집권 여당 정의개발당(AKP)의 지지율이 36.9%로 CHP의 30.1%에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튀르키예 100년 건설” VS “독재자”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9) 대통령이 7일(현지시간) 이스탄불의 군중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9) 대통령이 7일(현지시간) 이스탄불의 군중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017년 개헌으로 종신 집권의 야망을 드러낸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7일 이스탄불의 대규모 군중 집회에서 “새로운 튀르키예 100년을 건설하겠다”며 지지층 결집을 시도했다. 그는 야권 후보 클르츠다로을루가 쿠르드계 표심을 잡고 있는 점을 겨냥해 “테러리스트와 손 잡은 세력”이라고 몰아붙였다. “우리 정당은 친(親) LGBT(성소수자) 정당이 아니다. 그들을 투표함에 묻어버리자”고도 했다. 에르도안은 선거가 가까울 수록 보수·농촌 지역 표심을 노린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달 1일부터 옥수수·밀 등 곡물 수입품에 130% 관세를 부과키로 한 게 대표적이다.

반면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달 군중 유세에서 “우리의 경제와 민주주의를 위해 에르도안에게 5년을 더 잃을 순 없다”고 성토했다. 그는 “우리와 에르도안은 흑과 백”이라면서 “우리는 문명화된 세계를 원한다. 언론의 자유와 완전한 사법적 독립을 원하지만, 에르도안은 권위적이길 원한다”고 했다. 집권시 대통령 중심제를 다시 의회제로 돌려 놓겠다는 공약도 냈다.

지난달 자신의 집 주방에서 양파를 들고 선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클르츠다로을루 트위터 캡처

지난달 자신의 집 주방에서 양파를 들고 선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클르츠다로을루 트위터 캡처

학자·공무원 출신의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17년 CHP의 부대표가 체포됐을 때 앙카라에서 이스탄불까지 450㎞ 평화 행진으로 항의해 ‘튀르키예의 간디’라는 별명을 얻었다. 자신의 집 주방에서 양파를 들고 “이 양파 1㎏이 30리라(약 2000원)인데, 에르도안이 되면 100리라(약 6700원)가 될 것”이라고 하는 등 친서민적 이미지를 앞세우고 있다. 야권 6개 정당의 단일 후보긴 하지만, 지난 2018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CHP에서 탈당한 무하렘 인체가 독자 출마한 상황이라 반(反)에르도안 ‘표 분산’이 변수가 될 수 있다.

규모 7.8의 강진이 덮친 튀르키예 남부 카라만마라슈에서 건물 잔해에 깔려 숨진 15세 딸의 손을 살아남은 아버지가 놓지 못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규모 7.8의 강진이 덮친 튀르키예 남부 카라만마라슈에서 건물 잔해에 깔려 숨진 15세 딸의 손을 살아남은 아버지가 놓지 못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에르도안은 매 선거 때마다 야권의 분열에 힘입어 승기를 잡아왔지만 지난 2월 6일 튀르키예 대지진(규모 7.8)이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맞닥뜨리면서 어느 때보다 실각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게 외신들의 전망이다. 튀르키예 남부 11개 도시와 시리아 북부를 휩쓴 강진으로 최소 4만 6000명이 사망하고 수백만 이재민이 발생하면서 바닥 민심이 뒤집혔다. 특히 내진 설계가 면제된 부실 건물들의 피해를 두고 에르도안 정부의 졸속 재개발 정책이 원인이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남부 가지안테프의 누르다이에서 텐트 생활을 하고 있는 한 이재민은 지난 7일 영국 가디언에 “지진 이후 국가의 도움은 없었다”며 나는 평생을 (에르도안의)우익 정당에 투표 했는데, 이번엔 당나귀가 출마해도 우파는 절대 안 찍는다”고 분노했다.

앞서 1999년 튀르키예의 이즈미트 대지진 때도 당시 뷜렌트 에제비트 정부의 부실 재난 대응이 도마에 올랐고, 뷜렌트 정권은 그 다음 선거에서 패배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번 대지진으로 정부 예산 적자는 3월 한달 472억 2000만 리라(약 3조 2076억원)로 불어났다. 튀르키예 국내총생산(GDP) 대비 예산 적자 비율은 작년 9월 기준 3.5%에서 올해 5%로 확대될 전망이다. 미 뉴요커·포린폴리시 등은 이 때문에 이번 튀르키예 선거를 놓고 “지진 선거”, “신이 에르도안을 몰아내려 한다”고 묘사했다. 대선 이틀 뒤(5월 16일)는 마침 대지진 100일째가 된다.

“문제는 경제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의 지지자들이 지난 6일(현지시간) 이스탄불에서 환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케말 클르츠다로을루의 지지자들이 지난 6일(현지시간) 이스탄불에서 환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다만 민심 이반은 지진 이전에도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로이터통신은 “이번 선거가 에르도안에게 가장 큰 시험대가 된 배경은 그의 강압적이고 비전통적인 경제 정책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작년 10월 튀르키예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기 대비 85.51% 치솟으며 24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의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뒤집기 위해 중앙은행의 기준금리를 19%에서 8.5%까지 강제로 내리게 했고, 최저임금은 두 배로 인상했다. 리라화 가치는 2021년 40%, 작년엔 30% 가까이 폭락했다. 이로 인해 ‘리라 폭락과 고물가, 주식 시장 폭락’이라는 삼중고에 직면해야 했다. 에르도안은 “재집권 이후에도 저금리 기조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에르도안 불복 땐 정국 혼란 불가피

튀르키예 대선의 야권 주자 케말 클르츠다로을루(74)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대중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튀르키예 대선의 야권 주자 케말 클르츠다로을루(74)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대중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여론조사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자, 에르도안 측에선 선거 불복을 시사하는 발언이 나오고 있다. 에르도안의 측근인 슐레이만 소일루 내무부 장관이 지난달 “이번 선거는 서방에 의한 정치적 쿠데타”라고 주장한 게 대표적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에르도안이 결과를 승복하느냐에 따라 튀르키예의 민주주의 역사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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