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임덕 작년부터 시작 대통령과 참모만 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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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임기 말 권력 누수)은 관료사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공무원을 지휘하는) 대통령과 비서실장,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청와대 참모들만 레임덕 현상을 실감하지 못한다."

김대중(DJ) 정부의 청와대 부속실장, 기획조정비서관(1급)을 거쳐 교육인적자원부 차관보를 지낸 고재방 광주대 교수(법정학부)가 전하는 '레임덕론'이다. 고 교수는 1992년 야당 지도자인 DJ와 인연을 맺으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놨다. 98년 DJ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초대 1부속실장을 맡았다. 1부속실장은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일상 업무와 일정을 직접 챙긴다. 대통령과 만나는 권력 핵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할 수 있어 이른바 '문고리 권력'으로 통한다. 그래서 고 교수는 자연히 DJ 정부 권력의 생성.이동 과정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정권 초기 무소불위의 대통령 권력에 접근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군상(群像)의 모습과 임기 말 대통령의 힘이 빠지기 시작하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권력의 생리를 체득하게 됐다고 했다.

◆ "노무현 정권 레임덕 현상은 지난해 시작"=고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레임덕은 이미 지난해 시작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리 이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직 인사 때 몇 가지 징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그 현상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우선 '끗발 있는 자리'보다 '임기가 보장되는 자리'를 찾아나서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고 한다. 정권 초에는 청와대나 중앙부처의 요직에 대한 쟁탈전이 심했지만 지난해부터 부쩍 정부 산하기관이나 공기업의 임원으로 가기 위한 로비가 치열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법으로 임기가 정해진 임기직은 설사 정권이 바뀌더라도 임기 동안은 자리를 지킬 수 있어 외풍을 덜 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현상은 역대 정부의 임기 말에도 있었다. YS(김영삼) 정권 말기 잘나가던 고위직 인사들이 청와대 비서관이나 여당의 전문위원 등으로 파견 나갔다가 정권이 교체되면서 본래 소속 부처로 돌아오지 못하고 옷을 벗은 사례들이 지금도 공무원들 사이엔 회자하고 있다.

고 교수는 "중앙부처의 1급이나 차관보 등 고위직의 경우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주요 보직을 마다하거나 심지어 승진을 기피하는 풍조까지 생겨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잘나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해외 근무를 자원하거나 연수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얼마 남지 않은 정권에 잘 보여봤자 득보다는 실이 많다"거나 "현 정권이 끝날 때까지 한직(閑職)에서 조용히 지내자는 심리가 작용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 교수는 "지난해부터 공무원들 사이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 "권력에 취하면 레임덕 체감하지 못해"=고 교수는 "레임덕이 시작됐는데도 대통령과 그 주변만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권력에 도취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내일 당장 정권이 끝난다 해도 장.차관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수백 명이 있다. 이들은 대통령 주변을 맴돌며 인사 로비를 한다. 대통령 참모들이 이런 사람들과 만나 밥 먹고, 술 먹고 하다 보면 '레임덕은 무슨 레임덕이냐. 이렇게 장관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데…'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고 했다.

권력 실세들이 임기 말로 갈수록 민심을 외면하고 '레임덕은 없다'고 강변하는 현상도 이 때문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그는 DJ 정권 말기를 언급하며 "레임덕이 시작됐는데도 대통령과 청와대 안에 있는 핵심 참모들만 현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밖에서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웠다"고 회고했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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