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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은 극성스러운 욕망의 기관차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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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한국형 자본주의 엔진론’에 진중권 ‘천민성·몰취향’ 산물로 폄훼

월간중앙실명비판으로 유명한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가 저서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통해 한국형 자본주의의 엔진론을 폈다. 과연 그럴까? 시대의 논객 진중권이 ‘천민성’이라는 이름으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그 격돌.


이른바 ‘강남’이라는 곳에도 더러 가난한 사람이 산다고 들었다. ‘강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는 사람들 중에도 아마도 상당한 계층 차이가 있을 것이다.

수십억, 수백억 원의 자산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그곳에 오래 살다 보니 부동산값이 올라 높은 가격의 아파트 한 채만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자녀를 8학군에 보내기 위해 약간 무리해서 전입한 사람도 있을 게다. ‘강남’이라는 이름으로 이 모든 계층을 한데 묶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강남’이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일반적 인상이 있다. 가령 강남 사람들은 십 수억 원에 달하는 아파트에 살고,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명품으로 몸을 치장하며, 그 자녀는 값비싼 외제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

경제적으로는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불려 나가고, 정치적으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철저한 계급투표를 하며, 문화적으로는 뉴욕 취향을 추종하며, 심정적으로는 굴종적일 정도로 강한 친미적 성향을 갖고 있다.

그들은 세금을 탈루하는 다양한 테크닉에 정통하고, 정부에서 약간의 세금이라도 더 물리려고 하면 곧바로 레지스탕스가 되어 저항운동(조세저항)을 펼치며, 그러면서도 쓰레기 수거율과 적십자회비 납부율은 전국에서 꼴찌를 자랑한다.

평소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하위 계층과 구별하려고 드는 특권의식이 있으나 정책의 타깃이 될 경우에는 “왜 국민의 편을 가르느냐”며 조건부 평등주의자가 된다. 대충 이런 것이 ‘강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편견이 섞여 있을 것이다.

세간에 퍼져 있는 강남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도, 강준만 교수는 자신의 저서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에서 강남이 발휘하는 선도적 역할에 주목한다. 그의 말대로 좋으나 싫으나 강남은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이 많고, 가장 가방끈이 길고, 외국물도 가장 많이 먹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리하여 강남 사람들의 사고방식, 행동방식, 소비행태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곧 대한민국 전체의 것이 되고 만다. 대한민국의 모든 유행은 일단 강남에서 나와 전국으로 퍼져 나간다.

진중권 강남은 반자본주의적이다. 부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천민성을 숨기지 못한다.

강남이 발휘하는 선도적 역할 가운데 특히 논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사교육 열풍이다. 공교육의 이념은 ‘우리 아이들, 우리가 함께 잘 가르치자’는 것이고, 사교육의 목적은 ‘다른 아이들을 제칠 수 있도록 내 아이만 잘 가르치자’는 것이다.

공교육이 살려면 사회적 합의가 전자로 모여야 하나, 과도한 사교육은 이 사회적 합의를 무력화한다. 이렇게 공교육의 이념을 무너뜨리는 데서 강남은 전국을 주도하는 선도적 역할을 한다. 강남에서 시작하면 다른 곳의 사람들은 마지못해 따라 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부동산. 자기들 집값을 자기들끼리 올리든 내리든 어차피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남의 일이겠으나, 어찌 된 일인지 강남의 집값이 오르면 전국의 집값이 들썩거린다고 한다. 내 짧은 머리로는 이 심오한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없다.

정부에서 집값을 잡겠다고 하는 것도 서민을 생각해 하는 일이 아니라 기업의 비용을 줄여 경제 전체에 돌아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일 게다. 하지만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강남의 이해는 사회 전체의 이해와는 거꾸로 간다. 강남이 종종 정책의 ‘타깃’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강남은 자본주의 윤리 선도적으로 파괴”

이것이 강남 사람들만 탓할 문제는 아니다. 그저 그럭저럭 사는 이들도 기회만 닿으면 강남 사람들처럼 부동산 투기를 하고, 자기 수준에서 가능한 방법으로 나름대로 세금을 탈루하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자식만은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하고, 자신의 알량한 30평 아파트와 임대아파트 사이에는 높은 벽을 쌓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강남’은 한국인이 가진 욕망의 집약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는 뭐라고 할지 몰라도 대한민국 전체의 속마음은 사실 강남 사람들의 욕망을 욕구한다. 강남은 욕망의 기관차다.

강준만 교수는 강남에 첨단 기업이 몰려 있다는 등 몇 가지 사실을 들어 강남의 선도적 역할에도 긍정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강남에 첨단 벤처기업이 몰려 있다는 사실은 그 지역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가진 성향과 그다지 본질적 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강남이 한국의 문화산업을 주도하는 것 역시 원래 비싼 물건은 돈 있는 사람들부터 쓰다 점차 하류층으로 확산한다는 당연한 현상의 기술일 뿐이다. 문제는 다른 나라와 달리 강남의 부르주아들은 왜 그토록 극성스러운가 하는 것이다.

강준만 강남은 혁신의 전파 속도가 빠르다.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엔진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보수 언론에서는 종종 강남에 대한 비판을 ‘못 가진 자들의 사회주의적 한풀이’ 정도로 치부하고는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강남의 문제는 사회주의적이지 않다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충분히 ‘자본주의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다. 달랑 시장만 있다고 자본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막스 베버를 들지 않아도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어떤 형태로든-가령 유럽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형태로-‘자본주의 윤리’가 있어야 한다. 그 자본주의의 윤리를 선도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바로 강남이다.

흔히 우리의 것을 천민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자본주의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그것을 주도하는 주체들의 수준. 그런 의미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은 그것을 선도하는 강남의 천민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천민성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반영하는 매우 서글픈 현상이다.

서구 시민사회는 귀족의 궁정문화를 부르주아 계급이 넘겨받아 근대화한 후 이를 계몽과 교육을 통해 하층민에게까지 확산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하지만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한 피식민지 국가에서는 불행히도 지배층의 형성이 이런 경로를 밟지 못했다.

한국의 귀족계급은 조선 후기에 스스로 몰락해 버렸다. 찬란했던 선비문화의 문화적 성취는 남김없이 사라지고, 양반문화는 그저 반상을 가르는 봉건적 신분의식으로 형해화했다. 그러니 시민계급이 귀족에게서 넘겨받아야 할 교양이라는 것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에서 시민계급의 성장은 매우 더뎠다. 그나마 상공업으로 돈을 모은 자들 역시 신분제를 철폐하기보다 차라리 돈으로 양반을 사는 쪽을 선호했다. 한국 부르주아들의 머릿속에 근대적 교양 대신 봉건적 신분제 의식만 가득 찬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의 부르주아들은 거기에 부의 축적에서 정당성을 의심받는다. ‘부동산이야말로 재산 증식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상식처럼 통하는 것은 그동안 이 사회에서 부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예다. 정작 문제는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민의 태도다.

조선 후기 상공인들이 신분제를 철폐하기보다 차라리 돈을 주고 양반을 사려고 한 것처럼, 한국의 서민들 역시 이런 반사회적 축재 방식을 개혁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기회만 닿으면 그 짓을 본받으려고 한다. 여기서 강남의 천민성은 곧 한국 자본주의 전체의 천민성으로 확산한다.

‘과시욕’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과시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자크 르 고프는 <서양 중세문명>에서 중세 예술의 화려한 재료 취향이 게르만족의 미개성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졸부일수록 부를 과시하느라 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떡칠하게 마련이다. 반면 교양 있는 부르주아는 섬세한 취향과 풍부한 교양으로 신분을 드러내는 간접적 방식을 선호한다.

이때 우리는 ‘문화’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원래 제대로 가진 사람들은 천박하게 가진 티를 내지 않는다. 가진 티를 내는 것은 ‘그가 가진 것이 돈밖에 없다’는 빈곤함의 표식일 뿐이다. 권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끔 공연장이나 전시회에 가면 유력 인사들이 공연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특권을 과시하는 것을 본다. 남들처럼 돈 내고 표 끊고 들어와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공연을 지켜보다 슬며시 빠져나가다 남들에게 들키는 쪽이 훨씬 더 멋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어느 사회에나 상류층은 ‘교양’을 담당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상류층에 결여된 것은 바로 교양. 흔히 교양이라고 하면 영어 발음 굴리는 능력으로 이해하는데, 영어로도 얼마든지 유창하게 무식할 수 있다.

교양이라고 하면 연주회나 전시회 쫓아다니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봉건적 신분제 의식으로 가득 찬 머리에 바흐나 고흐를 이야기하는 입이 달린 것을 보는 것은 돼지 목에 걸린 목걸이처럼 초현실주의적 장면이다.

“상당수 강남 부르주아, 경제에 기생하는 존재”

부르주아가 갖추어야 할 ‘자본주의적 교양’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그것은 자본주의적 윤리의 미학적 표현이다. 윤리 없는 미학은 시체에 뿌리는 방향제에 불과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강남의 문제는 그곳의 문화가 ‘반자본주의적’이라는 데 있다. 자본주의는 부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체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허용하는 불평등에도 정도가 있으며, 그 정도를 넘어설 경우에는 그것이 역기능을 하게 된다. 또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최소한 기회의 평등으로 부의 불평등을 보완해야 한다.

한때 자본주의는 봉건적 신분제를 무너뜨린 매우 진보적 체제였다. 자본주의가 다시 신분제를 강화할 때 그것은 장기적으로 사회의 생산력을 떨어뜨리게 된다. 바로 이 상식을 실천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윤리이자 자본주의적 교양이다.

강남의 상징인 부동산 투기도 - 건설사 광고 먹고사는 신문사에서 아무리 궤변을 늘어놓아도 - 결국 생산 의욕과 경제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반자본주의적이다. 상식적으로 3억 원에 산 집을 4억 원에 팔아 1억 원을 남겼다면, 그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은 이상 누군가 그 증가분을 메워야 한다.

결국 자본이 회전해도 사회적 생산의 총량에는 아무 변함이 없다. 부동산 투기는 생산과 연구에 투자돼야 할 자본을 그저 공회전시키는 데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업의 비용 부담을 증가시키고,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을 떨어뜨려 경제에 부담을 주게 된다.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불리는 상당수 강남 부르주아는 경제에 기생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생의 특권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그들이 일으키는 또 하나의 바람이 바로 사교육 열풍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여서, 강남의 부르주아들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 반(反)자본주의적이고 전(前)자본주의적 행태가 오히려 ‘성공의 모범’으로 통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엔진인가, 아니면 천민자본주의의 상징인가 비판의 도마에 오른 서울 강남 일대 아파트 단지.

강남은 한국의 자본주의를 디자인한다. 디자이너의 작품 속에 작가의 취향이 반영되듯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에는 그것을 디자인한 이들의 몰골이 담겨 있다.

내 머리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파트를 좋아하는 취향이다. 사실 서구에서 아파트는 주로 서민층이 거주하는 곳으로 인식된다. 중산층 이상이면 벌써 도시 외곽의 단독주택을 찾아 나가고, 상류층쯤 되면 경관이 좋은 곳에 커다란 저택을 지어 살게 마련이다.

‘아파트’라는 것은 결국 제한된 토지 위에 가능한 한 많은 집을 짓기 위한 건축 방식이고, 그 결과 모든 집이 하나같이 똑같이 보이는 시뮬라크르(복제의 복제물)의 획일성을 갖게 된다. 신분의 과시는 차이를 드러내는 데 있는데, 왜 강남 사람들의 과시는 획일성의 형태로 이루어지는가?

내 머릿속의 강남 이미지는 ‘타워팰리스’를 닮았다. 과대망상에 걸린 듯한 건물의 외모도 끔찍하지만, 그 이전에 땅에서 한없이 떨어져 창문조차 없이 사방이 막힌 콘크리트 상자 안은 유기체의 서식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듣자 하니 외부인이 그 안에 들어가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고 한다. 타워팰리스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이 독특한 방식이 그들의 특권의식을 만족시켜 주는지는 몰라도, 사실 방문하기 위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곳은 집이 아니라 군부대나 실험실이다.

그 거대한 물신의 덩어리 속에 끼어 있는 콘크리트 상자 하나의 값이 무려 수십억 원에 달한다고 들었다. 그 돈이면 건축가에게 의뢰해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건축학적으로 연출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럼에도 강남의 부르주아들은 도심의 타워팰리스에 들어 살기를 선호한다.

‘거주’의 개념 아니라 ‘투자’의 관점 우세

이것을 보건대 한국 부르주아들에게서 신분의 과시는 ‘개인적 취향’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의 집단적 군락지를 구획짓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도대체 이 몰취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투기 마인드가 제 삶까지 지배해, 결국 제 몸이 들어 살 집조차 ‘거주’의 개념이 아니라 ‘투자’의 관점에서 보는 데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렇게 생명활동의 가장 중요한 부분까지 통째로 ‘투자’에 종속시켜 놓고, 열심히 ‘웰빙’에 몰두하는 이유는 또 뭘까?

하여튼 강남은 하나의 ‘현상’이어서, 내 이해력의 한계를 가볍게 넘어선다. 후대의 인류학자들에게 강남이라는 곳에 사는 부족은 대단히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진중권_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월간중앙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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