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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조' 양곡관리법 국회 통과…"과잉 생산·쌀값 하락 우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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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2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국회 본회의에서 양곡관리법 일부 개정법률안에 대한 수정안이 가결된 것에 대해 법률안에 대한 재의 요구안을 제안한다며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뉴시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2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국회 본회의에서 양곡관리법 일부 개정법률안에 대한 수정안이 가결된 것에 대해 법률안에 대한 재의 요구안을 제안한다며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뉴시스

정부가 매년 남는 쌀을 의무 매입하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23일 국회를 통과했다. 민주당은 농가 소득 보장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정부·여당은 매년 1조원 이상의 재정을 투입하고도 부작용이 훨씬 크다며 ‘대통령 거부권’ 요청을 시사했다. 전문가들도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쌀의 과잉 생산을 유도해 오히려 쌀값 폭락을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野 “정부 재량권 반영”…정부 “본질은 그대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초과 생산량이 3~5% 이상이거나 쌀값 하락 폭이 평년 대비 5~8% 이상이면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해야 하는 것이 골자다. 구체적인 기준은 해당 범위 내에서 정부가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쌀값 안정 및 농가 소득 보장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민주당의 주장이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당초 원안은 ‘3% 이상 초과 생산’, ‘5% 이상 가격 하락’ 등 단일 기준이 담겼지만, 민주당은 국회의장 중재안을 수용해 정부 재량권을 확대했다고 밝혔다. 또한 벼 재배면적이 증가한 해엔 기준을 충족하더라도 추가 생산량을 매입하지 않아도 되고, 재배면적이 증가한 지자체에 대해선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정부 매입 물량 감축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단서 조항도 추가했다.

과잉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돼 표결 절차를 밟을 예정인 23일 경기도 화성시 비봉농협 수라청미곡종합처리장에서 관계자가 수매 후 보관중인 쌀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과잉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돼 표결 절차를 밟을 예정인 23일 경기도 화성시 비봉농협 수라청미곡종합처리장에서 관계자가 수매 후 보관중인 쌀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인 국민의힘은 ‘의무매입’이라는 기본 틀이 유지되는 한 여전히 부작용이 크다며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했다.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은 본회의 통과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인 ‘남는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게 하는’ 본질적 내용은 그대로 남아 있기에 쌀 생산 농가와 농업의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며 “농식품부 장관으로서 대한민국 헌법에서 규정하는 법률안에 대한 재의 요구안(대통령 거부권)을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의무매입시 매년 1조 투입…“미래 농업·농촌 발전 저해”

정부는 쌀 의무 매입이 쌀값 안정이나 농가 소득 보장에 전혀 기여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개정안 원안을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의무매입 시 필요한 예산은 올해 5737억원에서 2027년 1조1872억원, 2030년 1조4659억원으로 매년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개정안이 시행되더라도 산지 쌀값은 2030년 17만2709원(80㎏ 기준)으로, 올해(18만626원)보다 오히려 낮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안 그래도 매년 쌀 소비량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과잉 생산 현상이 굳어질 것이란 전망에서다. 통계청의 ‘2022년 양곡 소비량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인당 쌀 소비량은 56.7㎏으로 2021년(56.9㎏)보다 0.4% 줄었다. 하루 소비량은 155.5g(한 공기 반) 수준이다. 1963년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후 역대 최소다.

김종인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의무매입 기준을 완화한) 수정안을 기준으로 다시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원안과) 큰 차이는 없다”며 “미세한 수치 조정만으로는 농가가 쌀 생산량을 줄일 유인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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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전략작물직불제, 쌀 가공산업 활성화 등을 통해 쌀 수급을 안정화하고 식량 자급률을 높이려던 정부 정책도 위협받을 수 있다. 여기에 막대한 예산이 매년 의무매입에 투입되면서 청년 농업인 육성, 스마트팜 산업 활성화 등 미래 농업·농촌을 위한 투자도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정부의 '2023년 쌀 적정 생산대책 추진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적정 벼 재배면적을 69만 헥타르(ha)로 보고, 지난해 벼 재배면적(72만7000ha) 대비 약 5%(3만7000ha) 줄이기로 했다. 과잉 생산으로 쌀값이 하락하고, 쌀값을 방어하기 위해 정부가 재정을 쏟아 시장에서 격리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다.

쌀 생산을 줄이는 농가를 위해 주는 당근이 ‘전략작물 직불제’다. 기존 쌀 외에 가루쌀·밀·콩 등 대체 작물을 재배하면 직불금을 지급하는 제도로, 자연스럽게 쌀 생산량 감소를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정부가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해준다면 농가 입장에선 굳이 쌀 대신 대체작물을 경작할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당장 남는 쌀을 매입하면 단기적으로 농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쌀값 하락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농민단체들 반발 “농민들도 동의 안한다”

대다수 쌀 농가에서는 ‘현행안보다 오히려 퇴행하는 법안’이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농민단체 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단지 수급조절로만 끝나지 않도록 농업생산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요청은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며 전면 재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도 “(개정안은) 구조적 수급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고, 쌀 가격안정을 도모하겠다는 명분마저 스스로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하나…“충분히 숙고”

정부에 이어 여당도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 예고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조만간 취임 후 첫 거부권 행사를 결단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대통령실은 “법률개정안이 정부에 이송되면 각계의 우려를 포함한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히 숙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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