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러 전투기 도발에 美 무인기 추락…우크라전 이후 첫 군사충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 상공에서 러시아군 전투기의 도발로 미군 무인기가 추락하는 사태가 14일(현지시간) 벌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ㆍ러가 군사적으로 직접 충돌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양국 간 긴장을 증폭시키고 있다.

미국 공군의 MQ-9 '리퍼' 무인기가 14일(현지시간) 흑해 상공에서 러시아 공군 Su-27 전투기와 충돌해 추락했다고 미 유럽사령부가 이날 밝혔다. 사진 미 공군

미국 공군의 MQ-9 '리퍼' 무인기가 14일(현지시간) 흑해 상공에서 러시아 공군 Su-27 전투기와 충돌해 추락했다고 미 유럽사령부가 이날 밝혔다. 사진 미 공군

미국 유럽사령부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 3분쯤 흑해 상공에서 미 공군 MQ-9 ‘리퍼’ 무인 정찰기 1대가 러시아 공군 수호이(Su)-27 전투기와 충돌해 바다에 떨어졌다. 미군 무인기의 정찰ㆍ감시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출격한 Su-27 2대 중 1대가 기체를 MQ-9 후미의 프로펠러에 부딪히는 방식으로 추락을 유도했다는 게 미군 측의 설명이다.

유럽사령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국제 영공에서 일상적인 작전을 수행 중이던 MQ-9을 안전하지 않고 비전문적인 방식으로 추락시켰다”며 충돌 직전 “Su-27 전투기가 연료를 뿌리는 등 환경 오염을 야기하는 무모한 비행”으로 MQ-9을 방해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미 공군의 제임스 B. 헤커 유럽ㆍ아프리카공군 사령관은 “러시아 측의 불안전한 행동으로 MQ-9은 물론 러시아 전투기도 추락할 뻔했다”고 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반면 러시아 측은 미국이 도발했다는 입장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이날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위해 임시로 설정한 공역의 경계를 미군 무인기가 침범했다가 조종력을 상실해 추락했다”며 “러시아 군용기가 무기를 사용하거나 접촉하지 않았고, 러시아 전투기는 기지로 무사히 귀환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패트릭 라이더 미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흑해 상공에서의 MQ-9 정찰 비행은 분쟁(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있었다”며 “매우 중요하고 분주한 국제수로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미 국방부는 추락기가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고 밝힐 뿐 무장 여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충돌 정황이 담긴 영상의 공개 여부와 관련해 라이더 대변인은 “기밀 해제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베테랑 조종사라면 가능한 수법"

실제 미군은 우크라이나 전쟁 전부터 동유럽에 MQ-9 등을 증강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정찰ㆍ감시 활동을 늘려왔다. 미 군사 전문 매체 밀리터리닷컴에 따르면 폴란드 북동부 미로슬라비에크 공군기지(2018년 배치)와 루마니아 큼피아투르지의 제71 공군기지(2021년 배치)가 거점이다.

이번에 추락한 MQ-9은 루마니아 기지에서 출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기지에서 흑해까지 거리는 약 450㎞다.

미국 공군은 나토 작전을 지원하는 정보 감시·정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2021년 1월 루마니아 큼피아 투르지의 제71 공군 기지에 MQ-9 '리퍼' 무인기와 약 90명의 공군 병력을 배치했다. 사진 미 공군

미국 공군은 나토 작전을 지원하는 정보 감시·정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2021년 1월 루마니아 큼피아 투르지의 제71 공군 기지에 MQ-9 '리퍼' 무인기와 약 90명의 공군 병력을 배치했다. 사진 미 공군

최대 14시간 정도 작전이 가능한 MQ-9은 통상 1대만 임무에 투입된다. 2대가 한 조를 이루는 유인기와 달리 상실되더라도 피해가 작기 때문이다.

MQ-9의 순항속도는 300㎞/h(최고속도는 480㎞/h) 정도로 일반적인 프로펠러 비행기 수준이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군 관계자는 “MQ-9이 느리다 보니 다소 무모한 방식이긴 하나, 베테랑 조종사라면 기체를 충돌시켜 추락시키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하늘의 암살자’로도 불리는 MQ-9은 AGM-114 ‘헬파이어’ 공대지 미사일 등을 장착할 수 있다. 미국은 2020년 1월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정예부대 쿠드스군 총사령관 제거 작전에도 MQ-9을 투입했다.

군용기 충돌은 냉전 이후 처음 

미ㆍ러는 상대국 군용기의 영공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근접 위협 비행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처럼 군용기가 직접 충돌하기는 냉전 이후 사실상 처음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초반에는 미군의 U-2 정찰기가 소련과 쿠바 영공에서 각각 격추된 적이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번 사태가 2001년 남중국해 상공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J-8 전투기와 충돌해 중국 하이난(海南) 섬에 불시착했던 미 해군 EP-3 정찰기 사례와 유사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발적인 충돌 상황을 조성해 미군의 은밀한 정찰 활동을 방해하는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군인이 격전지인 바흐무트 인근의 러시아군 진지를 향해 105mm 포탄을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군인이 격전지인 바흐무트 인근의 러시아군 진지를 향해 105mm 포탄을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간 러시아는 미군이 우크라이나군에 무기 지원은 물론 각종 정찰ㆍ감시 자산으로 획득한 정보를 건네고 있다며 이같은 행위를 중단할 것을 지속해서 요구해왔다. 미국 측 정보를 활용한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이 러시아군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무인기를 상대로 한 공격인 만큼 확전 가능성은 작을 것으로 관측했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우크라이나 전쟁 양상을 바꿀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긴 어려운 사안”이라며 “러시아도 미국과 확전까지 염두에 뒀다기보다 정보 감시ㆍ정찰(ISR) 자산에 대한 경고 차원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도 미군 무인기의 국제공역 비행 중 경로 방해 등 러시아의 적대적 행위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추락기 인양 놓고 경쟁할 수도 

민감한 정보가 담긴 추락기 인양 문제를 놓고도 미ㆍ러가 충돌할 수 있다. 미 국방부는 MQ-9 회수에 대해선 아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러시아가 먼저 끌어올릴 경우 미국엔 뼈아플 수 있다. 러시아는 MQ-9 수준의 무인기를 아직 운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러시아 흑해함대가 심해 인양 능력을 갖췄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미국으로선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관문인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가진 튀르키예의 입장이 관건이다. 튀르키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어떤 나라의 군함도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어 미 해군의 군수지원함을 통과시켜 줄지 불확실하다. 이 때문에 미 해군이 전문팀을 민간 선박에 태워 인양 작업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2018년 6월 스페인 인근 해양에서 RQ-4 '글로벌호크' 무인기 한 대가 추락하자 미 해군의 대형 군수지원함인 '아크틱함'(사진)을 보내 인양에 성공한 적이 있다. 사진 미 해군

미국은 2018년 6월 스페인 인근 해양에서 RQ-4 '글로벌호크' 무인기 한 대가 추락하자 미 해군의 대형 군수지원함인 '아크틱함'(사진)을 보내 인양에 성공한 적이 있다. 사진 미 해군

미 국방부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 접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의 우려가 미 국무부를 통해 모스크바로 전달되고 있다”고만 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