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의 가파른 긴축에 돈의 이동도 빨라지고 있다. 시장금리가 뛰며 가계의 여유 자금은 주식에서 은행 예·적금으로 몰렸다.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으며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데다 원자재 값 급등으로 늘어난 비용을 메우기 위해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돈은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이 6일 발표한 ‘2분기 자금순환’(잠정) 통계에 따르면 비금융법인(기업)의 순자금조달 규모는 46조9000억원으로 집계됐다. 1년 전(19조4000억원)보다 두 배 이상 급증했다. 기업이 예금과 주식 등으로 굴린 돈(자금 운용)은 59조6000억원에서 48조5000억원으로 줄어든 반면, 대출이나 채권발행 등으로 빌린 돈(자금 조달)이 79조원에서 95조4000억원으로 늘어난 결과다.
문혜정 한은 자금순환팀장은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기업의) 운전자금 수요가 늘어나면서 순조달 규모가 크게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자금순환은 각 경제 주체 간의 금융 거래(자금흐름)를 파악한 것이다. 통상 가계는 저축과 투자로 다른 분야에 자금을 공급하는 순자금운용 부분으로, 기업은 자금을 공급받는 순자금조달 부분으로 파악한다.
기업의 자금조달 수단은 회사채 발행에서 은행 대출로 이동했다. 기업이 올해 2분기 은행 등 금융기관 대출로 조달한 금액은 56조4000억원으로 1년 전(49조3000억원)보다 7조1000억원 늘었다. 특히 만기 1년 이하의 단기대출로 조달한 액수는 26조6000억원으로 1년 전(2조3000억원)보다 10배 이상 늘었다. 문 팀장은 “장기 대출보다 단기 대출 금리가 유리해 기업이 단기 대출 위주로 대출을 늘린 듯하다”고 말했다.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 규모는 8조3000억원으로 1년 전(6조9000억원)보다 1조4000억원 늘었다. 다만 한국전력공사(한전) 등 공기업의 채권 발행이 9조1000억원을 차지했다. 민간기업의 채권 발행(-1000억원)은 오히려 감소했다.
기업이 채권 발행보다 은행 대출로 움직인 건 채권 발행에 따른 조달비용이 많이 늘어난 결과다. 지난해 2분기에 회사채 금리(AA-, 3년물)가 연 1.93%로 기업대출 금리(연 2.69%)보다 낮았는데, 올해 2분기에는 회사채 금리(연 3.87%)가 대출 금리(연 3.63%)보다 높아졌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의 긴축이 계속되고 있는 데다, 기업 성과가 나빠지면서 투자 위험도가 높아지는 등 기업의 차입여건이 개선되긴 힘들어 보인다”며 “자금조달이 어려운 기업은 투자를 줄이거나 인건비 등 다른 비용을 줄이는 방안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리 상승과 안전자산 선호 등으로 가계 운용자산에선 주식에서 예·적금 등으로의 ‘역(逆) 머니무브’가 확연했다. 가계 운용자산 중 장기 저축성 예금은 2분기에만 17조5000억원 불었다. 1년 전 증가 폭(1000억원)보다 급증했다. 같은 기간 채권 투자액도 5000억원 늘며 1년 전(-5조4000억원) 증가액보다 컸다.
반면 주식 투자액은 24조8000억원 늘어나는 데 그쳐 1년 전(31조9000억원)보다 증가 폭이 둔화했다. 올해 2분기 가계 금융자산 중 주식 비중은 18.5%로 전 분기(20.1%)보다 1.6%포인트 감소했다. 반면 예금 비중은 43.1%로 전 분기(41.8%)보다 2.3%포인트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