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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칼럼

화가 김동유와 마오쩌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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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제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요즘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중국 화가 장샤오강(張曉剛)의 전시회를 보았다. 갤러리 아트사이드가 마련한 '망각과 기억'전(11월 20일까지)이었다. 3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데도(인사동엔 공짜 전시회도 많다) 평일에는 약 120명, 주말엔 200~300명이 전시장을 찾는다고 아트사이드 관계자가 전했다. 출품작 대부분은 전시장 문을 열기도 전에 국내 수집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그의 대표작 '소녀' 포스터 한 장을 1만원에 구입해 사무실로 돌아와 벽에 붙여놓았다. 왠지 그럴듯해 보였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또래 나이 중국 화가의 그림 사진을 사다니. 세계 미술시장을 휩쓸고 있는 중국 바람이 나에게까지 불어 닥친 셈이다. 손철주 학고재 주간의 말이 떠올랐다. "그림에선 말입니다. 한류(韓流)가 아니라 한류(漢流)예요. 엄청납니다. 중국발 한류가 번갯불이라면 우리 미술 한류는 반딧불 정도예요."

장샤오강은 1998년 제작한 작품 '혈연 시리즈:동무 제120호'를 미화 1만 달러(약 950만원)에 팔았었다. 이 작품은 8년 뒤인 올해 3월 뉴욕 소더비에서 열린 '현대 아시아 미술' 경매에서 97만9200달러(약 9억3000만원)에 낙찰됐다. 작가 본인조차 이 소식을 듣고 "시장이 미쳤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지난달 15일 영국 크리스티에서 열린 경매에서는 장샤오강의 '대가족 시리즈'가 13억8500만원에 거래돼 중국 현대 미술작품의 최고 경매가 기록을 또 깼다. 세계시장에서 잘나가는 중국 작가는 장샤오강 외에도 왕광이.웨민쥔.양사오빈.왕두 등 양손으로 꼽기도 힘들다.

갓 시작돼 아직은 '반딧불'이지만, 우리 미술도 해외시장에서 점차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현존 국내 작가들이 해외 경매시장에 본격 진출한 신호탄은 2004년 10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였다. 크리스티 한국사무소에 따르면 당시 배준성.최소영 등 여섯 작가가 8점을 내놓았다. 추정가 9만~12만 홍콩달러이던 배준성의 작품이 35만8500홍콩달러(약 4300만원)에 낙찰돼 출품작 중 최고를 기록했다. 올해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선 무명에 가깝던 김동유(41) 작가가 대박을 터뜨렸다. 작품 '마릴린 먼로 vs 마오 주석'이 추정가의 25배가 넘는 258만4000홍콩달러(약 3억1000만원)에 낙찰됐다. 현존 한국 작가의 해외경매 최고가 기록이다.

김동유의 '마릴린 먼로 vs 마오 주석'은 마오쩌둥 전 중국 국가주석의 얼굴을 작은 픽셀(pixel.화소)로 삼아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화면 가득 그린 팝아트 기법의 유화다.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의 얼굴로 가장 자본주의적인 할리우드 스타 마릴린 먼로를 표현했기에 홍콩 크리스티에서 크게 먹혀들었던 것이다. 우리 미술이 세계화되려면 동.서양인 누구에게나 통하는 기법과 이미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김동유가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김동유 작가도 이 작품에 대해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며 "같은 기법을 사용하더라도 어떤 이미지를 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여 년간 대전에서 미술학원 강사를 겸하며 외롭게 작업해온 그는 "유명해지니까 큰 화랑들이 다투어 전시회를 열자 하고 컬렉터들이 나를 찾아오는, 옛날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생기더라"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 농가의 외양간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었다.

26일 홍콩 크리스티에서 또 한 차례 현대 아시아 미술 경매가 벌어진다. 김동유의 '붓다와 박생광', 김창열의 '회귀', 안성하의 '담배꽁초와 유리병' 등 국내 화가 23명이 출품한 33점이 다른 아시아 작가 작품과 겨룬다. 이런 일들이 쌓여 앞으로 한국 작가들이 해외시장에서 '미술 한류(韓流)'를 이루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려면 김동유처럼 필요하면 마오쩌둥도 동원하는, 세계화된 안목과 전략을 우리 화가들도 갖춰야 한다.

노재현 문화·스포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