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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음성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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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심새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심새롬 정치팀 기자

심새롬 정치팀 기자

얼굴에 초상권이 있다면, 목소리에는 음성권이 있다. 음성권은 자신의 음성이 허가 없이 녹취되거나 공표되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법원은 4년 전 판례에서 음성권의 실체를 처음 인정했다. 2018년 10월 서울중앙지법이 ‘누구나 자신의 음성이 함부로 녹음되지 않을 헌법상 기본권을 가진다’고 판시했고 항소심도 이를 받아들였다.

실정법 보호를 받기 시작한 데는 최근 몇 년간 음성권이 무방비로 빠르게 침해받은 환경이 영향을 미쳤다. 과거 녹취에는 ‘보이스레코더’ 등으로 불린 소형 기계가 사용됐다. 하지만 이젠 스마트폰 이용자 누구나 언제, 어디서건 주변 소리를 자유롭게 녹음한다. 삼성 갤럭시 등 국내 스마트폰에는 통화 중 녹음 기능도 있다.

유독 높은 차량용 블랙박스 보급률 역시 부지불식간 음성 녹취를 빈번히 일으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법대로’, ‘증거 보존’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차량용 블랙박스 보급률이 거의 80~90%에 달한다는 게 업계 추산이다. 미국·유럽 등 서구뿐 아니라 이웃나라 일본도 아직 보급률이 10~20%에 머무는 것과 대조적이다.

몰래 녹음이 늘 나쁜 의도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서울교통공사가 지난달 18일 직원들에게 녹음기 기능을 탑재한 목걸이형 신분증 700여개를 지급했다. 연간 150건이 넘는 지하철 이용객들의 폭행·폭언에 시달리는 역무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간호사·판매원·캐디 등 접객 업무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스마트워치나 사원증, USB 모양의 녹음기를 소지하는 게 불문율이라고 한다. 성희롱성 발언이나 폭언, 이른바 ‘진상’ 손님 등에 상시 노출된 이들이 찾아낸 일종의 자기방어책이다.

이런 가운데 상대방 동의 없는 대화 녹음을 최대 징역 10년형으로 처벌하는 내용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등장해 논란이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8일 “동의받지 않은 녹음이 헌법상 행복 추구권의 일부인 음성권을 침해한다”며 박덕흠·김선교·박대수 의원 등 같은 당 의원 10명과 함께 법안을 발의했다.

의원들이 기자와의 통화, 티타임, 식사 자리에서 녹음 여부를 살피는 장면을 종종 마주하곤 한다. “지금 내 말 녹음 (안)하나”란 질문에 가장 좋은 답은 “앗, 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라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