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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 11.2㎝…위도 조정 기능, 지구 어디서든 시간 측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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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최응천 문화재청장(가운데)이 18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일영원구’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최응천 문화재청장(가운데)이 18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일영원구’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해시계가 발견됐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18일 미국 경매에서 발견해 들여온 조선 후기 지구본 모양의 소형 해시계 ‘일영원구(日影圓球)’를 공개했다.

일영원구는 ‘둥근 공 모양의 해시계’라는 뜻이다. 높이 23.8㎝, 무게 1.3㎏인 이 시계의 윗부분에는 지름 11.2㎝의 구리로 만든 공이 달려 있다. 이 공의 표면에는 가로세로 5㎜ 크기의 글씨로 십이지(十二支)를 두 줄로 둘러 새기고, 96각(하루를 96등분한 것)을 표기한 세로줄을 빽빽하게 그어 시간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받침대에 배가 은으로 새겨져 있고, 지지대의 각도를 조절해 남반구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든 방식으로 보아 항해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영원구에는 기준침이 만드는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앙부일구’(조선시대 대표적 해시계) 방식에 더해, 물시계 자격루(조선시대 사용한 자동 시보장치)처럼 정시를 한자로 표기하는 기계식 시간 측정 방식이 함께 담겼다. 겉면의 세로줄 96칸으로 하루의 시간을, 가로줄 13줄로는 일 년의 절기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영원구의 과학적 가치와 원리를 분석한 충북대 이용삼 명예교수는 “국내에서는 구형의 해시계가 보고된 적이 없고, 서양에는 둥근 형태의 해시계가 있긴 하지만 단순한 기능만 있다”며 “휴대가 가능한 소형으로 만든 데다 위도 조정도 가능해 남반구를 비롯해 어디서나 정확한 시간을 확인할 수 있고, 전통적인 자격루·혼천의의 원리를 더한 귀중한 과학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십이지 시간을 표시하는 시패는 디지털 방식,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건 아날로그 방식인데, 소형이면서도 디지털과 아날로그 모두 볼 수 있는 재밌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일영원구는 학계 어디에도 보고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형태의 시계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해 10월 처음 일영원구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우리나라 유물이 맞는지, 어떤 용도인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 5개월 넘게 문헌 조사 및 전문가에게 자문했다.

공 모양 본체엔 ‘대조선 499년’ 각인

기록으로 존재하지 않는 기기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구리 공 모양의 본체에 새겨진 한자 ‘대조선 개국 499년 경인 7월 상한 신제(새로 제작함), 상직현인(尙稷鉉印)’이 결정적 힌트가 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강혜승 유통조사부장은 “제작자와 제작 시기가 적힌 문구가 있어 조사에 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제작 시기(1890년)와 제작자(상직현)를 특정해 둔 덕분에 문헌 조사를 통해 유물의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일영원구 제작자 ‘상직현’은 1881년 일본 수신사 별군관 파견도 갔던 조선 후기 무신이다. 1880~1900년대 초까지 관직을 맡았던 기록이 있고, 일영원구 제작 시기와도 일치한다.

그의 아들 상운은 1881년 청나라 영선사로 파견갔다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화기를 들여온 사람으로, 집안 전체가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강혜승 부장은 “금속을 두들겨 제작하는 건 기술자에게 맡겼더라도 기기를 고안해낸 제작 책임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며 “외래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고 기술에 밝고 관심이 많은 가문이라는 배경도 일영원구의 제작자라는 추정의 타당성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기존의 해시계는 기준침이 고정돼 있어 한 지점에서만 정확한 시간 측정이 가능했지만, 일영원구는 장소에 따라 위도와 방위만 맞추면 어디서든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다. 일영원구의 핵심에 해당하는 공 모양 구체의 위쪽 절반은 지지대에 고정돼 있고, 아래쪽 반구만 회전하며 해를 따라 움직일 수 있다. 반구에 있는 T자형의 기준침(횡량)이 해를 정면으로 향하도록 하면 그림자가 가장 좁아지는 지점이 있다. 그 순간 그림자의 끝이 가리키는 글자가 그때의 시각이 된다.

오늘부터 국립고궁박물관서 공개

시각을 측정하기 전 ①기둥에 있는 다림줄(추를 매단 실, 지금은 유실됨)로 수평을 확인하고, ②나침반을 이용해 공의 중심축이 동서남북 중 정북을 향하게 한 뒤, ③기둥의 고정 장치로 구의 중심축 기울기를 조절해 북극과 평행이 되도록 맞추면 일영원구가 지구와 똑같은 상태로 햇빛을 받게 된다. 지구를 흉내낸 구체가 햇빛을 받는 모양을 보고 시간을 측정하는 원리다.

일영원구가 어떻게 국외로 나갔는지의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940년대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 장교가 이를 매입했고, 그가 사망한 후 유족으로부터 일영원구를 사들인 미국의 수집가가 경매에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3월 23일 낙찰받아 5월 20일 국내에 들여온 것이다. 해당 경매업체에 따르면 매입 자금은 6만8750달러(약 9000만원)다.

일영원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전시를 통해 19일부터 공개된다. 해시계 앙부일구 옆에서 관객을 맞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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