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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목적 투자금 받아 개인이 써버리면…대법 “횡령죄 아냐”

중앙일보

입력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뉴스1]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뉴스1]

범죄의 준비·실행을 위해 여러 사람이 모은 돈을 누군가 개인적인 용도로 써버렸더라도 횡령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횡령 혐의로 기소된 A씨(51)의 상고심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0일 밝혔다.

A씨는 2013년 1월께 피해자 2명과 함께 의료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 요양병원을 운영하기로 약정한 뒤, 두 사람에게서 투자금 총 2억500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당초 만들기로 한 협동조합은 병원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세 사람의 갈등으로 좌초됐다. 이후 A씨는 투자금을 두 사람에게 돌려주지 않고 2억3000만원을 개인 빚을 갚는 데 썼다.

1심은 A씨의 횡령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반면 2심은 형량을 6개월로 낮췄다. 이 재판에 앞서 A씨는 피해자 두 사람 중 1명에게서 2억200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사기)로 기소됐다가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는데, 재판부는 이 부분은 면소 대상이라고 보고 나머지 금액의 횡령 혐의만 유죄로 판단했다. 면소란 확정판결이 있거나 공소시효가 완성된 경우 등의 기소를 면하는 판결을 말한다.

2심 재판부는 투자자들 모두가 의료인이 아니기 때문에 비영리 협동조합을 설립한 뒤 요양병원을 설립·운영하며 수익금을 배분하기로 한 동업 약정은 의료법에 따라 불법 행위(범죄)이며, 무효라고 지적했다.

다만 동업 약정 자체가 무효라고 해도 A씨로서는 투자자들의 출자금을 반환할 의무가 있으므로 개인 용도로 이 돈을 쓴 것은 횡령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반면 대법원은 2심이 유죄로 인정한 횡령죄까지 무죄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의 쟁점은 의료법을 위반해 맺어진 관계에서 횡령죄가 성립하는지 여부였다.

기존 판례에 따르면 횡령죄가 성립하려면 재물의 ‘보관자’와 ‘소유자’ 사이에 신임에 의한 위탁관계가 존재해야 하고, 이 위탁관계가 형법상 보호 가치가 있는지는 사안에 따라 규범적으로 따져야 한다.

이번 재판에서 대법원은 “규범적 관점에서 볼 때 범죄의 실행행위나 준비행위를 통해 형성된 위탁관계는 횡령죄로 보호할만한 가치 있는 신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 사건에서는 민사상 반환청구권이 허용된다고 해서 무조건 형사상 보호가치가 있는 위탁관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대법원은 “의료기관을 개설할 자격이 없는 자의 의료기관 개설 및 운영이라는 범죄의 실현을 위해 교부됐으므로 해당 금원에 대해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신임에 의한 위탁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결국 A씨에게 횡령죄 성립을 인정한 원심판결에는 횡령죄에서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의 의미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며 사건을 부산지법에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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