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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르」에 감춰진 증오와 화해/고병익(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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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9월말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유네스코 관계의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나고서도 여러나라 참석자들이 항공편 관계로 하루 이틀 더 묵게 되었는데 다음날이 마침 회교국의 휴일인 금요일이라 몇사람들이 호텔 근처로 산책에 나섰다. 우리 호텔은 본래는 인터컨티넨탈호텔 이었으나 호메이니 회교혁명 이후에 구미식 이름들이 모두 바뀌는 통에 이것도 라레국제호텔로 개칭되었는데,이는 바로 옆에 「라레」공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란 곳곳에 강한 반미
공원 한모퉁이에 유명한 융단박물관이 있어 찾았더니 그날따라 문이 닫혀있어 일행은 공원안을 거닐며 시민들이 분수가에서 운동과 휴식을 즐기는 모습들을 보면서 대학쪽으로 걸어갔다. 이름있는 테헤란대학의 겉모습이나 분위기라도 맛보자는 것이었다.
대학에 가는 길은 차량통행을 막아 놓았으나 걸어가는 사람들은 꾸역 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이윽고 마이크 소리가 터져나오는데 온 거리를 떠나가게 하는 격한 그 어조로 보아 단순한 기도의 모임보다는 어떤 분노와 규탄의 집회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제서야 우리는 전날 아침 영자신문 테헤란 타임스에서 읽은 것이 생각났다.
신문에는 오늘이 「성스러운 방위주간」의 마지막 날이라서 대집회가 전국적으로 열린다고 했다. 이 주간은 이라크가 이란에 전쟁을 걸어 침략해온지 1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주간이다. 그래서 이 악독한 8년간의 전쟁을 뒤에서 부추긴 미국에 대한 규탄으로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모임을 거국적으로 갖는다고 신문은 전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꾸역 꾸역 모여들고 있었고 이미 대열을 짜고 플래카드를 쳐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해 오는 패들도 있었고,또 울창한 가로수 밑에 자리를 깔고 꿇어 앉아 기도참가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어쩐지 공기가 외국인으로서는 험악한 것 같이 느껴졌다.
일행의 파키스탄 및 이집트의 교수들이 같은 회교도이면서도 오히려 대학구경을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가자고 발길을 돌린다.
미국에 대한 반감과 증오는 아직도 도처에서 강하게 간취된다.
우리 호텔의 로비 벽면에 커다랗게 「미국을 쳐부수자」라고 영자로 새겨놓았는가 하면,다른 일류 호텔에서는 정면 입구에 같은 문구가 걸려있는 것도 보였다.
거리의 담벼락 같은데에 「미국ㆍ이스라엘ㆍ소련을 쳐부수자」는 한묶음으로 배격한 문구도 아마 이란­이라크 전쟁중에 써붙인 것 같은데 그대로 남아있다.
증오받던 전제군주인 팔레비를 앞잡이로 만든 것이 미국이고 호메이니 회교혁명에 반대해 이라크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이란 침략을 도와준 것이 미국이며 현재의 페르시아만사태로 사우디에 중동지배 거점을 만들려는 것이 미국이라고 이란은 본다.
더구나 이란에서는 50년대초 석유국유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모사데크 총리 세력을 무자비하게 소탕시킨 것이 미국이고 그 이후 줄곧 석유이권을 지배해 왔던 것으로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 “우리는 친구”
외국여행자의 눈에는 이란이 호메이니 사후 1년이 넘었는데도 그의 회교혁명은 그대로 살아있는 것 같이 보였다. 어떤 사무실이나 가게에서도 그의 초상이 걸려있지 않은 곳이 없고,텔리비전 방송에서도 그의 생시 모습과 설교장면이 매일같이 되풀이 방송되어 처음보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남여 구분이 새로 엄격하게 되어 학교에서도 공학이 철회되고,여자들은 다시 검은 차도르 속으로 움츠러들어야 했으며 심지어 국제항공편의 여승무원까지도 예외없이 새까만 천의로 몸을 휘감아야 한다.
인구 1천만명이 넘는 서울만한 크기의 테헤란에 여행자를 위한 위락시설이나 관광조직이 없으며 거리의 교통표시나 간판에서 로마자가 거의 없어졌다. 행정부나 입법부의 요직은 모두 회교성직자(뮬라)들로서 채워지고,모든 행동이 정통회교의 율법에 따라야한다고 되풀이 강조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경직성은 이제 약간씩 풀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공원산책 나갔을 적에 색깔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 셋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데 놀랐고,이들이 고등학생들이며 겨우 몇마디의 영어를 가지고 외국인과 통화해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같았으며,이라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서슴지 않고 「우리는 친구들」이라고 하는 활달한 태도에 다시 놀랐다.
이라크와의 전쟁이 얼마나 인명과 재산의 큰 희생을 가져왔으며 얼마나 뼈에 사무치도록 분노하고 있는가를 이란 어디서나 보아왔는데 젊은 세대의 이런 감정도 있을 수 있나 보다.
지식층 속에도 회교혁명에 대한 일종의 저항감은 있어 보인다. 단적인 예로 테헤란의 가로명을 설명하면서 「아메리카」 거리가 「아프리카」 거리로 개칭되고 간선도로가 「혁명」거리로 개칭되었다는 등의 내력을 냉소 섞인 어조로 말해주는 데서도 나타난다.
휴일날 「미국에 죽음을」 집회에 놀라 대학구경을 그만둔 날 오후에 테헤란 북변산록에 위치한 팔레비궁전 자리의 굴리스탄 박물관 구경에 나섰다. 안내자도 예측 못한 일인데 문이 닫혀 있었으며 수위의 설명은 오늘 테헤란 대학에서 집회가 있어 박물관을 닫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융단박물관이 닫혔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북한의 주체사상 연상
그러니 그처럼 격렬한 듯 하던 구호 외침이나 집회의 열기도 어딘가에 「관제」같은 요소가 있었던 것도 같다.
휴전된지 2년이 되고,이라크가 쿠웨이트 점거에 따른 곤경으로 이란에 국경조정과 포로교환에서 많은 타협을 제안해 이란은 승리를 부르짖을 수 있게 되고,거기다가 쿠웨이트 사태로 유가가 뛰어 외환수입이 한달에 8억달러가 늘었다고 한다. 경직성이 누구러질 요인들은 있다.
회교혁명 10년 정통원리의 철저한 준수,미국에 대한 철저한 반대,서구문화에 대한 철저한 배격으로 치닫던 흐름이 호메이니 사후라고 곧 달라질 것 같지는 않고 어쩐지 이북의 주체사상체제와 견주어지는 연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한림대 교수ㆍ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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