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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도 동침한다" 국가 생존 위한 현실주의 외교안보[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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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외교안보 어젠다
천영우 지음

박영사

엄중한 외교·안보 정책 지침서인데, 특유의 시니컬한 위트가 곳곳에 숨어 있다. 밀어 올려도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30년 간 한국 외교를 삼켜온 북핵 문제에서부터 미·중 '그레이트 게임' 속 우리의 활로까지, '한반도의 운명을 바꿀' 5대 과제를 다룬 저자의 관점과 주장은 그래서 더 송곳 같다.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각각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와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이 낸 첫 저서. 북한과 핵·미사일 분야, 유엔 외교의 독보적 전문가답게 새 대통령이 마주할 외교안보 도전과 해법을 씨줄날줄로 엮은 사례들과 함께 제시한다.

"강자는 할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당해야 할 고통을 당한다"(아테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 "우리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국익이 영원할 뿐" (19세기 영국 파머스턴 총리). 외교 현장에서 힘도 동맹도 없는 국가들의 운명을 지켜본 저자가 가슴에 담아 둔 현실주의(realism)외교 금언이다.

저자는 "대한민국이 안전과 번영을 확보하려면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고 악마와도 동침할 수 있다는 냉철한 현실주의적 외교안보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1차 대전 시기 영국은 지역 패권에 도전하는 독일에 맞서려 숙적 프랑스, 러시아와 손잡았고, 2차 대전 후엔 소련의 유럽지배를 막기 위해 대서양동맹과 나토에 독일을 끌어들였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77년 만에 대외 군사 개입으로 안보 전략을 전환한 독일을 가장 반기는 나라는 현대사에서 독일 침략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프랑스와 폴란드다.

문재인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은 김 위원장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오른쪽은 조한기 당시 청와대 의전비서관.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은 김 위원장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오른쪽은 조한기 당시 청와대 의전비서관. [청와대사진기자단]

저자는 누가 위협인지, 그 위협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판단하는 '위협인식'(threat perception)은 외교안보 전략의 출발점이며 위협 인식에 고장이 나면 적과 동지의 구분도, 누구와 손을 잡을 지 누구를 경계할 지도 판단력이 흐려진다고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가장 큰 위협이고, 한반도 밖에선 지역 패권 확보에 나선 중국이 대한민국의 생존과 자주독립을 위협할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다. 이를 토대로 한미동맹, 대중국 및 일본 관계 등이 설정돼야 한다. 미·중사이 균형자나 중립 주장은 기존 한미동맹과 양립할 수 없는 현실도피적 환상이다.

저자는 미국·인도·일본·호주 안보협의체인 쿼드에 한국이 참가해야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면서 폴란드의 외교 정책 금언 "우리가 없는 자리에서 우리에 관한 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Nothing about us without us)를 든다. 독일, 소련이 1939년 8월 23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면서 폴란드를 분할점령하기로 했지만 폴란드는 이를 몰랐다. 인도·태평양 핵심 강국들이 우리 없는 자리에서 한반도 안보와 미래에 영향을 미칠 논의를 하는 것을 허용해선 안 되는 이유다. 쿼드는 중국의 패권적 횡포를 억지할 집단적 레버리지로서도 중요한 플랫폼이다.

〈YONHAP PHOTO-3547〉 북한 김정은, 신형ICBM 화성-17형 시험발사 명령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이 전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 아래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시험발사를 단행했다고 3월 25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신형 ICBM 시험발사를 단행할 데 대한 친필 명령서를 하달하고 시험발사 현장을 직접 찾아 ICBM 화성-17형 시험발사 전 과정을 직접 지도했다. 2022.3.25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nkphoto@yna.co.kr/2022-03-25 06:50:36/ 〈저작권자 ⓒ 1980-202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YONHAP PHOTO-3547〉 북한 김정은, 신형ICBM 화성-17형 시험발사 명령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이 전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 아래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시험발사를 단행했다고 3월 25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신형 ICBM 시험발사를 단행할 데 대한 친필 명령서를 하달하고 시험발사 현장을 직접 찾아 ICBM 화성-17형 시험발사 전 과정을 직접 지도했다. 2022.3.25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nkphoto@yna.co.kr/2022-03-25 06:50:36/ 〈저작권자 ⓒ 1980-202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북한 급변시 한국과 미국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국제사회는 어떤 법적 근거에 따라 움직이는지, 핵·미사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북한군 장교들과 주민들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시나리오별로 저자의 생각을 풀어 낸다. 어떤 정부든 5년내 닥칠 일로 생각하고 대비하고 있어야 할 일이다.

유엔의 역할을 거론하는 이들이 적잖은데, 저자는 통일 과정에서 유엔 안보리의 개입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와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나라(중국·러시아)가 발언권을 행사할 경우 국익에 해롭거나 한국 정부의 손발을 묶는 결정이 나올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독자적 핵무장론과 전작권 전환에 대한 논쟁적 주장도 흥미롭다.

독도 이슈와 한일대륙붕공동개발협정 등 향후 한일관계의 잠재적 뇌관, 해법을 소개한 저자는 과거의 유령과 싸우느라 미래의 적을 판별하지 못하고 대비를 소홀히 하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미련한 짓이며, 국민 정서가 국익을 지배하는 고질을 바로 잡아야 한일관계가 바로 설 수 있다고 역설한다. 미래지향적 비전과 통큰 리더십을 가진 양국 지도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강경하지만 원칙적인, 대한민국의 총체적 안보 지도를 그려볼 수 있는 입체적인 책. 어쩌면 북한 지도부도 일독하고 싶을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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