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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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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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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좌·우익이 모두 손을 내밀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안재홍의 국민당, 김성수의 한국민주당 등이 민족통일전선을 모색하면서 이승만을 최고 지도자로 추대하기로 했다. 허헌 등 좌익 인사들도 이승만에게 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은 광복 직후 서울에서 1개월에 걸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대통령 후보 선호도 1위였다.

국내 정치기반이 없었던 이승만은 어떻게 이런 정치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을까. 이택선 충남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연구원은 『우남 이승만 평전-카리스마의 탄생』에서 “미국 라디오 방송을 적극 활용해 권위를 획득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승만은 1942년 6~7월 ‘미국의 소리(Voice of Korea)’에서 한국어와 영어로 광복군의 활동을 알리는 육성 방송을 했는데, 그것이 국내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유투브 0412.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유투브 0412.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1941년 12월 말 기준 한반도에서 라디오 수신기를 보유했던 한국인은 14만1354명이었다. 당시 여론 주도층 상당수가 ‘미국의 소리’를 청취했고, 이승만의 상징성을 높이 평가하게 됐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도 유튜브를 적절히 활용해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 외교에서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가 유튜브로 전달한 항전 의지와 평화에 대한 촉구는 우크라이나를 묶고 전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대중매체와 정보혁명을 다룰 줄 아는 것은 현대 정치인의 큰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