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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판 '대처'의 몰락…열혈 시진핑 바라기, 왜 中에 팽 당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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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연임을 포기한 캐리 람의 쓸쓸한 퇴장. AP=연합뉴스

연임을 포기한 캐리 람의 쓸쓸한 퇴장. AP=연합뉴스

캐리 람(65) 홍콩 행정장관의 별명은 ‘파이터(fighter)’였다. 그런 그가 지난 4일 그의 연임 포기를 선언했다. 링 위에서 내려오겠다며 흰 타올을 던진 셈이다. 2017년 행정장관으로 홍콩 정부의 수장 자리에 오른 뒤, 캐리 람은 홍콩 시위대와 싸웠고, 홍콩 민주주의의 퇴행을 비판하는 국제사회 여론과 싸웠으며, 팬데믹과도 싸웠다. 홍콩 안팎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친중 노선을 돌파하는 그의 모습엔 연임을 향한 단단한 의지가 녹아있었다. 그러나 캐리 람은 결국 연임 의지를 꺾었다. 중국과 홍콩의 정치 구조를 감안하면 캐리 람의 퇴진엔 베이징(北京)의 뜻도 포함돼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람의 후임으로 유력한 인물인 존 리(65)를 보면 중국 정부의 의지가 선명히 읽힌다. 경찰 출신인 존 리는 중국의 뜻에 맞춰 홍콩의 반정부 시위를 진압했고 보안법 집행을 주도했다. 베이징이 캐리 람을 팽(烹)하고 존 리로 ‘선수 교체’를 했다는 해석이 일각에서 나오는 배경이다.

2019년 강경 진압 당하는 홍콩 시위대. 로이터=연합뉴스

2019년 강경 진압 당하는 홍콩 시위대. 로이터=연합뉴스

람의 발목을 잡은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의 연임은 유력해보였다. 일명 ‘우산 시위’를 포함해 수년 간 이어진 홍콩 민주화 시위를 강경 진압했고, 친중 노선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코로나19 대처에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인데다 확진자가 지난해 폭증하면서 베이징의 눈 밖에 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 바라기였던 그이지만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예민한 베이징의 심기가 불편했다는 말이 나온다. 베이징이 캐리 람을 ‘손절’했다는 의미에서다.

홍콩 차기 행정장관으로 유력한 존 리. AP=연합뉴스

홍콩 차기 행정장관으로 유력한 존 리. AP=연합뉴스

캐리 람으로서는 억울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는 전형적인 실무형 관료에 가깝다. 전공은 정무보단 도시 발전계획 등 실무다. 시위에 팬데믹 바람이 가라앉고 실무 감각을 발휘할 때가 되자 팽을 당한 격이다.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람 장관은 지난해 11월 한 연설에서 “나는 홍콩의 앞날이 밝다고 자신한다”며 “내가 30년만 젊었다면 홍콩의 발전에 더욱 기여하고, 더욱 발전된 홍콩에서 더욱 오래 좋은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기여할 수 있는 길인 연임을 그는 포기했다. 람 장관 본인도 지친 기색이 없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일각에선 그가 “내게 기회가 있다면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는 녹취 폭로가 나오기도 했다.

람 장관은 전형적인 자수성가 정치인이다. 중국에서 이민온 가난한 근로자 출신 부모에게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홍콩대학에 진학한 뒤엔 학생운동에 가담한 적도 있으나, 졸업 후 착실한 공무원으로 탄탄 대로를 달렸다. 공무원 연수로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다니던 시절, 중국인 수학자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다.

남편과 포옹하는 캐리 람. 2017년 한 행사에서의 모습. AP=연합뉴스

남편과 포옹하는 캐리 람. 2017년 한 행사에서의 모습. AP=연합뉴스

그가 본격 두각을 드러낸 때는 2007년. 홍콩 정부의 도시계획을 담당하는 발전국장으로 재임하던 때다. 당시 홍콩의 큰 논란 거리 중 하나가 영국의 통치를 받던 시절을 상징하는 퀸스피어라는 건물의 철거였다.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국의 잔재를 없애야 한다”는 뜻을 관철시켰다. 이때부터 중국 정부는 그를 눈여겨본다. 2011년에는 불법 주택 개축을 강력 단속하면서 시민의 호응을 얻었다. 행정가로서는 홍콩인의 신뢰를 얻었던 셈이다.

이듬해, 당시 행정장관인 렁춘잉(梁振英)은 그를 2인자인 정무사(政務司) 사장으로 발탁했다. 총리에 해당하는 자리다. 캐리 람은 홍콩의 마가렛 대처 격으로 급부상한다.

캐리 람을 '거짓말쟁이'라고 비판하는 홍콩 시위대. AP=연합뉴스

캐리 람을 '거짓말쟁이'라고 비판하는 홍콩 시위대. AP=연합뉴스

이후 그는 2014년 우산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중국 정부의 마음을 확실히 얻는다. 2017년 중국 정부의 지지를 등에 업은 그가 간접선거인 행정장관 선거에 출마해 얻은 득표 수는 777표. 1194표 중 66.81%를 차지한 777표는 ‘럭키 세븐’ 선거라는 별칭을 낳았다. 그러나 결국 그의 재임은 단임으로 끝나게 됐다. 보안법이며 시위에 팬데믹으로 얼룩진 탓에 이렇다할 레거시(legacyㆍ유산)도 꼽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의 후임으로 유력시되는 존 리는 현재 정무사 사장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 4일 “존 리의 임기가 시작되면 홍콩은 경찰국가가 될 것”이라 우려했다. 홍콩 행정장관 선거는 다음달 8일, 람 장관의 임기 종료일은 6월3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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