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전대협의장 모두 구속/의장검거 계기로 본 전대협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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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통일ㆍ반제운동 등 새 영역 개척/내각제개헌 대비 총력전 준비
제4기 전대협의장 송갑석군(24)이 24일 안기부 수사관들에 의해 검거됨으로써 전대협 의장은 제1기부터 제4기까지 전원이 사전 수배ㆍ구속됐다.
87년6월 민중항쟁의 열기를 바탕으로 전국 1백만 대학생을 대표하는 최대 학생운동 조직으로 등장했던 전대협은 그 영항력의 크기만큼 공안당국으로부터 철저한 감시의 대상이 되었던게 사실이다.
87년8월 제1기 의장으로 뽑혔던 이인영군(26ㆍ당시 고대 총학생회장)으로부터 송군까지 전대협은 각 기마다 통일ㆍ반제운동 등 새로운 학생운동의 영역을 개발해왔고 의장들의 경우 무술유단자로 구성된 학생 경호원들의 철저한 보호를 받는 등 과거의 학생운동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제1기 전대협은 87년 8월19일 서울ㆍ부산 등 전국 9개지역의 각지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 의장들이 모여 충남대에서 최초의 단일조직을 만들면서 출발했다.
제1기는 때마침 불어닥친 대통령선거열풍에 휘말려 김대중 비판적 지지파,후보단일화파,민중후보지지파 등으로 갈리는 내분을 겪었고 지도부가 비판적 지지를 결정했지만 김후보가 패배함으로써 한때 존립의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선거당시 대규모 공정선거 감시인단을 구성,투ㆍ개표과정을 지켜보는 등 처음으로 조직적인 선거감시기능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1기 의장 이군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1년6월의 실형을 산뒤 현재 전민련에서 활동중이다.
위기에 빠졌던 전대협이 통일운동이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설정한 것은 88년5월 출범한 오영식군(24ㆍ당시 고대 총학생회장)의 제2기때부터.
2기 전대협은 「남북학생회담」을 요구하며 최초로 통일문제를 학생운동의 전면으로 내세워 당시만해도 금기로 여겨졌던 통일논의를 표면화시킨 선구자역할을 했다.
88년9월 의장 오군이 검거된뒤 대행을 맡은 정명수군(24ㆍ당시 연대 총학생회장)은 당시 논란이 됐던 5공청산 문제와 관련,국회에서 증언을 하는 등 전임 의장들과는 다른 정치적인 모습도 보였었다.
정군의 제2기 대행체제는 「전두환ㆍ이순자부부 체포결사대」를 만들어 연희동 일대에서 연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전두환 전대통령의 백담사 은둔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의장대행 정군은 유일하게 구속되지 않고 현재 사회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전대협의 활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는 89년초 출범한 임종석군(24ㆍ당시 한양대 총학생회장)의 제3기때로 평가되고 있다.
제3기는 출범당시부터 평양축전참가를 내세우며 정부의 통일정책에 정면으로 맞서고 나섰다.
결국 임수경양의 평축파견으로 정국을 초비상으로 몰아갔고 의장 임군과 축전 준비위원장 전문환군(24ㆍ당시 서강대생) 등 의장단 전원이 곧바로 수배를 받으며 「망명 전대협」을 이끌었다.
임군은 1계급 특진과 현상금 1천만원이 걸린 수배상태에서도 10개월간이나 신출귀몰하며 기자회견을 해 「임길동」이란 별명을 얻었으나 89년12월 기자회견중 검거돼 현재 복역중이며,전군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 상태다.
이번에 검거된 제4기 의장 송군을 올해2월 지방대생으로는 처음으로 전대협의장을 맡았다.
송군이 의장이 된 배경은 광주항쟁 10주기라는 상징성과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내부적 필요성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송군은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전체운동을 지도하기가 쉽지 않아 제4기 전대협은 5월9일 반민자당 시위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송군이 검거됨에 따라 제4기 전대협의 활동은 일단 「정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년으로 예상되는 내각제개헌추진과 관련,학생들이 총력전을 준비하는 점을 감안할때 전대협의 활동을 내년에도 정국의 커다란 「변수」가 될것으로 예상된다.<김종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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