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018~2019년 남‧북‧미 간 정상회담 등 ‘평화 분위기’를 연출하는 중에도 뒤로는 미사일 관련 부품 밀수를 계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 패널은 1일(현지시간) 공개된 연례 보고서에서 “북한은 제재를 위반해 핵‧미사일 개발을 계속해왔다. 핵실험을 하지는 않았지만, 핵물질 생산 능력을 지속적으로 증강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 패널은 매해 두 차례 보고서를 발간하며, 이번 보고서는 지난해 8월에서 올해 1월 사이 수집한 대북 제재 이행 관련 정보 등을 담았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이 지난달 2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발사한 뒤에야 모라토리엄(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파기라며 강하게 규탄했지만, 북한은 수년 동안 미사일 능력 진전을 위한 노력을 멈춘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외교관 신분 활용, 적극 조달
보고서는 특히 주러시아 북한 대사관 소속 외교관 신분으로 현지에서 각종 미사일 부품 조달을 위해 활약해온 ‘오용호’라는 인물에 주목했다. 그는 이미 지난 1월 미국이 독자 제재 대상에 올린 인물이다.
보고서는 오용호가 2016~2020년 아라미드 섬유, 회전 노즐, 베어링 등 탄도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다양한 부품을 ‘직물 기계’ 등으로 위장해 북한으로 반입했다고 지적했다. 2018년 3월에는 러시아로부터 액체연료 추진 탄도미사일에 쓰이는 스테인리스 합금 9t을 사들였다.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약 한 달 전이다.
그는 또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열렸던 2018년 6월에는 러시아 전문가로부터 고체연료 제조법 사본을 넘겨받았다. 특정 회사의 촉매제를 배합하는 방법이었다. 2019년 12월에는 또 다른 전문가로부터 러시아 순항미사일 TRDD-50의 설계도도 확보했다.
영변-평산-강선서 활동 포착
북한의 추가 핵실험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보고서는 북한의 핵 관련 시설에서 활발한 움직임이 관측된다고 밝혔다. 영변 핵시설에서는 5MW 원자로 가동 징후가 포착됐다. 평산 우라늄 광산에서도 갱도 중 한 곳에 컨베이어가 설치되고, 정기적으로 철도 활동이 이뤄지는 등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
또 다른 우라늄 농축 의심 시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강선에서도 대형 트럭이 주기적으로 오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보고서는 이런 움직임의 목적은 분명치 않다고 했다.
극초음속, MaRV 기술서 성과
전문가 패널은 북한의 ‘소나기 발사’를 통한 미사일 기술 진전 현황을 분석하는 데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다. 예년의 두 배 가량 됐다.
전문가 패널은 보고서에서 “북한이 극초음속 활공체(Hypersonic Glide Vehicle), 기동형 탄두 재진입체(Maneuverable Reentry Vehicle)와 액체연료 탄도미사일 추진체를 결합한 신기술 이행에서 성과를 이룬 것으로 분석된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지난 1월 5일과 11일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또 단‧중거리 미사일에서 액체 및 고체 연료 추진방식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부각했다. 신형 고체연료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해상 배치 목적의 잠수함 발사 미사일로 운용하려는 시도에도 주목했다.
전문가 패널은 “신속 배치 능력, 광범위한 기동성 등 작전‧기술 능력에서 발전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고도 지적했다. 또 “미사일 부대의 탄력성 증가”를 꼽으며, 지난해 9월과 올 1월 이뤄진 철도 기동 탄도미사일 발사를 언급했다.
유조선 직접 사들이는 北
북한의 불법 석탄 수출 및 유류 불법 수입은 코로나 19 방역을 위한 봉쇄로 인해 여전히 예년에 비해서는 저조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북한은 다양한 회피 기법을 동원해 해상에서의 불법 행위를 이어갔다.
이와 관련, 과거처럼 제3국 선박이 북한 항구에 직접 입항해 원유나 유류 제품을 공급하는 방식은 중단됐다. 보고서는 “이는 코로나19 방역 조치로 보인다. 대신 북한 국적 유조선만 원유를 직접 항구로 실어 나르는 방법상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북한 영해 인근까지는 외국 선박이 원유를 싣고 오되,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북한 선박이 이를 넘겨 받아 입항하는 방식이다.
북한의 유조선 및 화물 선박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에 선박을 이전하거나 판매하는 것은 안보리 결의상 금지돼 있다. 이에 북한은 제3국의 브로커를 끼고, 유령 회사나 허위 정보를 활용하는 등 복잡한 절차로 선박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선박 ‘디지털 신분세탁’해 운항
선박을 취득한 뒤에는 소유주 변경 등록을 하지 않거나 선박을 ‘디지털 신분 세탁’해 운항하는 일도 잦았다.
예를 들어 북한 선박에 유류 제품을 환적한 것으로 추정되는 ‘뉴 콩크’호의 경우 2018년 6월 벨리즈 국적 ‘F 론라인’호 등 다른 선박의 해상이동업무 식별번호(MMSI)를 이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MMSI는 말 그대로 해상에서 선박을 식별할 수 있는 고유 번호인데, 다른 배인 것처럼 위장하는 데 이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실제 전문가 패널이 지난해 선박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뉴 콩크’호와 ‘F 론라인’호라고 알려진 배는 같은 선박으로 추정된다. 배의 일부만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다시 페인트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뉴 콩크’호는 이미 제재 위반 의심 선박으로 추적 대상에 올라 있는데, 이런 식으로 배의 신분을 세탁하면 다른 배처럼 속여 위반 행위를 계속할 수 있는 셈이다.
아직은 엄격한 방역 조치 때문에 북한이 이런 방법을 통해 불법으로 반출‧입하는 물류의 양 자체는 크지 않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잦아들면, 남‧북‧미 간 대화 국면에서 이미 느슨해진 제재망의 허점을 노려 이처럼 정교해진 수법을 제재 회피에 적극 활용할 우려가 크다.
“사치품 풀자” 왜 나왔나 했더니…
한편 보고서는 북한이 2020년~2021년 중반 사이 북미와 유럽, 아시아 등 최소 세 곳의 가상화폐거래소에서 5000만 달러 이상을 훔친 것으로 한 회원국은 보고 있다고 전했다. 주요국 기관들에 대한 해킹 시도도 계속 이뤄진 것으로 파악됐다.
전문가 패널은 또 코로나19 봉쇄로 수입 자체가 막히며 북한으로의 사치품 유입에 대한 보고는 한 건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전자장비나 화장품 등의 가격도 급등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북한 내 부유층조차 사치품에 대한 접근 자체가 차단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박지원 국정원장은 지난해 8월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에서 대화 재개를 위해 북한에 ‘사치품으로 인식되는 생필품’의 수입을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고급 양주와 양복 등을 예로 들며 “평양 상류층 배급용, 상류층의 생필품”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