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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장으로 읽는 책

홍성란 『매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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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매혹

매혹

내 얼굴 편치 않은 건
내가 날 괴롭힌다는 것

헛간 데 떠다녔다고 하루가 웃는 들길에서

나 말고
날 쥐었다 폈다 누가 할 수 있겠니

홍성란 『매혹』

저런 생각은 인생의 저녁에야 할 수 있다는 걸까. 제목이 ‘저녁의 마음’이다. 시조시인 홍성란이 9년 만에 새 시집을 냈다. 넉넉히 삶을 관조하는 시선, 멋 부리지 않은 쉬운 시어가 돋보인다. ‘흙탕이 좀 튀었으나/ 그것은 생의 무늬// 꼴뚜기도 망둥이도 모두가 스승이었다// 번뇌가 보리(菩提)라는 말 오늘에야 들었다.’ 번뇌가 보리(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메아리’의 전문이다.

이런 시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힘쓰는 기쁨 빼앗지 말라 설하시는 아흔두 살// 삶은 밤 속살을 티스푼으로 긁어 드리니 아니야, 손가락으로 살살 내가 긁어먹는 손맛도 있지 숟가락 쥐는 힘이라도 쓰고 속살 긁어내는 힘이라도 쓰고 이렇게라도 움직거려야 살지 걷지도 못하고 뒹굴뒹굴, 하는 일이 없잖아 힘을 써야지 돈을 못 쓰면 힘이라도 써야지 살살// 모녀의 빛바랜 사진 속에는 아홉 살 과꽃이 한창이었네.” 아흔 노모 앞에, 아이처럼 앉아있는 나이든 어떤 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축복같은 장면, ‘축복’이라는 시다.